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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less Apr 19. 2024

마닐라 마닐라

사랑해 마지않던 순간들

마닐라는 가장 오래 머문 이국땅이기도 하지만, 사람들과 도시의 풍경, 그 공기에 대한 기억들이 이상하리만치 맴도는 곳이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5년만에 방문하게 된 마닐라는 여전히 덥고 여전히 습하고 시끄럽고 자동차 매연으로 가득하고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었다. 매일 드나들던 바와 카페들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영원할 것 같던 풍경들은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었다. 짧은 여행의 기록이다.

인트라무로스는 마닐라의 가장 아픈 현대사를 간직한 곳이다. 2차대전 중 미국과 일본은 이곳을 차지하려고 3일간 포격을 퍼부었고, 희생자는 수십만의 필리핀인들었다. 그 기억이 상흔과 폐허로 남았다. 

인트라무로스의 한 가운데를 지키는 산 아구스틴 교회는 세워진 지 450년이 됐다. 마닐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로 꼽힌다. 전쟁중에도 포마를 피한 걸 보면 어쩌면 신의 가호는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교회 앞을 스쳐가던 풍경이다.

산 아구스틴 교회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모두 무채색인데(그럼에도 '스테인드 글라스'라 불러도 되려나?) 우윳빛에 가깝다. 그 덕에 교회 안은 흑백이 어울리는 공간이다.

외국에서 만나는 성상들은 대게 무척 사실적이었다. 성스럽고 아름답다기보다 거칠고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산 아구스틴의 성상들도 그랬는데, 종교라는 것이 애초에 두려움을 먹고산다는 점에서는 당연할 수도 있겠다. 혹은 서구 종교의 도입시기 제국주의자들의 서슬퍼런 얼굴이 반영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호화롭던 색은 이제 바래서무채색이 되어버린 교회의 천장이다.

인트라무로스의 또 다른 명소 포트 산티아고. 이름 그대로 요새가 있던 곳은 상흔 가득한 공원으로 바뀌었다. 파시그 강을 볼 수 있다는 것 외에 별다를 게 없는 곳인데, 마닐라에 올때면 찾게 된다.

포트 산티아고의 성벽에서 탄흔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이 색 때문에 포트산티아고를 늘 찾는지도 모르겠다.

마카티는 외국 기업들이 많이 들어와있는 번화한 곳이다. 처음 방문했을 때, 너무 깔끔하고 힙한 곳이어서 놀랐고, 입구마다 총을 든 가드가 건성건성 가방 검사를 해서 놀랐었다. 마닐라에 머물때는 매일 이 거리를 걸어 출근했었다.

마카티의 오아시스 같은 휴식처 그린벨트.

그린벨트는, 이름처럼 열대의 정원으로 꾸며진 복합몰이다. 적당히 좋은 음식과 술을 파는 라운지와 바가 있고, 고가의 부티크들도 들어서있다. 당연히 가격대가 높다.

어쩌면, Strum's 보다 더 자주 갔던  카페 아바나는 쿠바 음식과 시가를 내주는 클럽이다. 라틴 재즈가 공기처럼 술렁인다. 이곳 서버들은 유독 열성팬들이 많은데, 폭 좁은 챙모자에 주황색 탑과 허리까지 옆트임 된 롱스커트를 입고 테이블 사이를 날렵하게 돌아다닌다. 시가를 주문하면 커터와 토치를 가져오는데, 불이 잘 붙지 않을 경우 시가 한쪽을 입술에 물고 붙여준다. 내 친구는 매번 불이 잘 붙지 않기를 바라며 시가 끝을 바라봤었다.

카페 아바나는 여전히 그곳에서, 여전히 라틴 재즈를 연주하고, 여전히 맛있는 쿠바 음식을, 여전히 매혹적인 서버들이 가져다주고 있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찾아보니, 결국 코로나를 견디지 못하고 폐업한 것 같다. 나는 이제 어디에 가서 헤밍웨이가 즐겼다는 스테이클 먹나.)

마닐라의 대표적인 부촌 보니파시오에는 플렉스에 최적화된 하이 스트리트가 있다. 우리 물가로 치면 한끼에 100만원이 넘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가격만큼이나 호사스러운 인테리어와 돈을 바르고 다니는 듯한 스페인계 이주민들을 볼 수 있다. (그러고보니 그 클럽 이름이 뭐였더라? 인더스트리얼 버전의 Smoke on the Water가 흘러나왔었는데.)

보니파시오의 다른 편에는 마켓!마켓!이 자리하고 있다. 프랑스식 마르셰와 현대적 건물의 몰인데, 얼리지 않은 망고스틴과 온갖 열대과일들을 찾아낼 수 있다. 보니파시오답게 가격대가 합리적이지는 않지만.

세계에서 3번째로 크다는 SM Mall of Asia는 코엑스몰의 다섯 배 크기라고 한다. 건물 크기가 그렇다는 것이고 건물 주변에 마련된 부대시설까지 하면 최소 열 배는 되지 않을까 싶은 수준이다. 앰블렘 역시 이름에 걸맞는 크기다. 사람들이 그물망도 없이 작업을 하고 있어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었다.

마닐라베이.

마닐라 베이의 공사판에서 발견한, 앙상한 골조의 액자다.

공사판은 인근 빈민가 아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했다. 그러고보면 어린시절 집 근처의 좋은 놀이터도 공사판이었다. 자갈과 나무로 전쟁놀이를 하다가 머리가 깨져 울며 돌아갔던 어느날이 기억났다.

마닐라 베이의 일몰은 엄청난 붉은색으로 유명한데, 공기 오염이 워낙 심하기 때문에 그렇게 됐단다. 오염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베이징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일몰을 보면서, 마닐라로의 마지막 여행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해 마지않던 마닐라, 그곳의 사람들과 도시 풍경, 그 공기에 대한 기억들은 마음 한구석을 지키다 천천히 사라져갈 것이다. 모든 소중했던 것들이 대개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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