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라이 Dec 15. 2023

꽤나 능숙한 주부가 되었다는 기분

집밥 요리의 미덕

저녁으로는 볶음밥을 만들어 먹었다. 남편과 나는 돼지고기를 넣은 김치볶음밥, 아이를 위해서는 새우볶음밥을 만들었다. 시가에서 보내주신 김장김치로 냉장고 한켠이 묵직해지자, 뒤늦은 숙제를 하듯 묵은 김치를 처치하는 중이다. 며칠 전에는 김치찌개를, 지난주에는 김치전을 했다.


볶음밥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요리지만, 누구나 맛있게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다. 초등학교 때 만화잡지에 나온 레시피를 보고 처음 참치김치볶음밥을 만든 이래 볶음밥은 내가 가장 자주 만들어본 음식이다. 하지만 '제대로' '맛있게' 한 적은 별로 없다. 불 조절을 잘못해서 김치가 와싹 타버리거나, 식용유를 괄락괄락 추가하다보니 동남아 스타일 기름볶음밥이 돼버린다거나, 맛있으라고 김칫국물을 넣는다는 게 김치죽이 되어버린다거나... (대충 그런 걸 먹고 살아왔던 과거의 나여 미안...)


하지만 이번 볶음밥은 대성공이었다! 통조림 햄이나 참치가 아니라 돼지고기를 넣고 김치볶음밥을 한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보통은 집에 돼지고기가 없기 때문이다. 있다면 구워 먹었을 것이다. 마침 낮에 초록마을에 들렀다가 세일하는 삼겹살과 목살을 넉넉히 사온 참이었고 삼겹살을 조금 덜어내 볶음밥에 넣기로 했다.


지방이 많은 삼겹살 두어 줄을 살짝 굽는다. 겉 표면이 어느 정도 익고 돼지기름이 좔좔 흐르면 가위로 고기를 잘라준 뒤 잘게 썬 김치를 넣고 같이 볶는다. 김치가 어느 정도 익었다 싶으면 밥을 넣고, 다진마늘과 맛간장도 한 스푼씩 넣어 잘 섞으며 볶는다. 마지막에는 미리 씻어둔 콩나물을 두어 줌 추가하면 화룡정점. 불을 끄고 난 뒤 참기름을 한 바퀴 돌려 마무리한다. 계란후라이도 따로 해 얹었다.


아이 볶음밥은 새우를 넣고 했다. 어제 미리 해동해둔 홍새우살을 씻어 아보카도유에 살짝 볶는다. 냉동실에 얼려둔 브로콜리와 당근 큐브, 건표고, 밥, 콩나물을 넣고 볶는다. 미리 우려놓은 채수를 중간중간 부어서 타지 않게 조절함과 동시에 맛을 더한다. 역시나 불을 끄고 나서 참기름을 살짝 둘러 줬다.


이렇게 만들어낸 볶음밥으로 세 식구가 만족스런 저녁식사를 했다. 음식이 맘에 안들면 '안무~'를 외치고 반찬투정을 하는 두 살 아기도 '완밥'을 했다. 일취월장한 요리 실력에 나 스스로도 조금 감탄했다. 이제 나는 참기름은 발연점이 낮기 때문에 불을 끄고 넣어야 타지 않고, 다진마늘이 고기의 잡내를 잡고 감칠맛을 더해준다는 것을 안다. 내 냉장고 속에는 신선한 돼지고기와 콩나물, 손질된 채소 큐브와 채수가 준비돼 있다.


볶음밥처럼 간단한 요리를 하는데도 만들고 치우는 데는 먹는 것보다 많은 시간이 걸린다. 커다란 팬과 작은 아이 냄비, 밥그릇과 수저, 요리 주걱 등등 설거지도 한가득이다. 미리 장을 보고 채소를 다져 실리콘 큐브에 얼려두고 채수를 찬물에 냉침해 꼬박 하루 우려내고 현미를 불려 밥을 짓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정말이지 가성비 없는 시간 활용이다.


그러다보니 20대 때는 요리를 거의 하지 않았다. 돈도 시간도 가성비와 효율이 제일 중요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20대 후반에 결혼을 하고 나서도 요리에 취미가 붙지는 않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요리와 살림이 너무 어려워서였다. 누가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고, (사실 하라고 한 사람도 없음) 가이드도 인수인계도 가시적인 보상도 없는 일에 부딪히며 매일 우울해 했다. 사수도 없이 갑자기 현업에 투입된 인턴처럼 매일 스스로의 무능함을 확인하며 설왕설래했다.


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책을 뒤적여 보는 편이다. 살림법 책을 사서 읽었다. 스테인리스 제품은 연마제를 제거하고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의 충격이란...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채 그대로 칼집에 집어넣어 녹이 슨 칼, 냄새 나는 행주, 곰팡이 핀 나무 도마를 내다 버렸다. 싱크대 배수구는 과탄산소다로 청소하면 된다는 걸 배웠고 코팅 팬을 길들일 줄도 알게 되었다.


결혼한 지 어느덧 6년차, 엄마가 된 지는 3년차다. 지금은 살림이 꽤 재미있다. 코팅 팬보다 다루기 어렵지만 건강과 환경에 좋은 스텐 팬을 능숙하게 사용하고, 고급 올리브유와 건강한 달걀 고르는 방법을 안다. 간단한 아기 빵이나 쿠키를 뚝딱 구워낼 수도 있다.


그동안 무엇이 달라졌을까? 살림법 책 한두 권 읽었다고 갑자기 주부9단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테인리스 연마제 제거는 할 줄 알게 됐지만 그 뒤로도 내내 가게 반찬과 배달 음식, 인스턴트 식품을 먹고 살았다. 살이 찌고 생활비가 헤펐지만 일이 워낙 바쁘던 시기기도 했고 해서 대충 그러려니 하며 지냈다.


그러다 아기가 태어났고, 반 년이 지나 이유식을 시작하게 되니 요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배달 오는 아기 이유식이나 반찬에 편견은 없지만(분명 나보다 요리 잘 하는 엄마들이 좋은 재료로 만들어서 파는 것일 거라고 믿는 편) 아기가 먹어주지 않으니 다 소용이 없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재료로 직접 이유식을 만들어야 했다. 평생 몇 번 사본 적도 없는 소고기 다짐육과 브로콜리, 청경채, 연근 같은 걸 장바구니에 담았다. 다행히 이유식은 간을 하거나 맛을 낼 필요가 없어 쉬웠다. 잘 익었는지만 확인하면 됐다.


그 와중에 친정 엄마가 암 진단을 받으시는 사건이 있었고(다행히 1기 때 발견해서 빠르게 수술 후 회복되셨다) 평생 마른 체질이었던 내가 과체중을 넘어 경도비만으로 넘어가는 충격을 겪으며 식생활 개선이 절실해졌다. 배달음식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힘 닿는 데까지 집밥을 해먹고 있다.


구할 수 있는 한 유기농과 무농약, 동물복지를 고집한다. 미세플라스틱과 자극적인 조미료 범벅 대신 건강한 집밥을 먹으니 속이 편하다. 체중과 식비 지출액도 적정 수준으로 돌아왔다. 이유식을 만들며 시나브로 축적된 내공 덕에 이제는 내 음식 솜씨도 꽤 괜찮다.


무엇보다 기분이 좋다. 할 때마다 어렵고 싫던 일이 이제는 꽤 자신 있는 일이 됐다. 자괴감 대신 유능감과 성취감, 보람과 뿌듯함을 느낀다. 내 새끼가 방긋방긋 웃으며 맘마를 다 먹고 '더죠~' 할 때의 흐뭇함이란. (자동 엄마 미소 발사 중) 꽤나 능숙한 주부가 되었다는 기분, 참 괜찮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