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라이 Dec 20. 2023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하루하루

육아하는 엄마의 일상에 대하여

8시 30분. 아이도 나도 늦잠을 잤다. 기저귀를 갈고 우유를 좀 먹이고 옷을 입혀 어린이집에 데려다줬다. 우리 집에서 어린이집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지만(아이가 협조가 잘 될 경우 한정) 시간이 늦었고 날도 추우니 차로 슝 다녀왔다.


9시 30분.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침대로 되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하지만 10시에 예약해둔 필라테스 수업이 있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지만, 돈을 생각해본다. 뒤늦은 세수를 하고 운동복을 입는다. 시간이 다 돼 가지만, 늦더라도 가는 게 낫지. 식빵 한 쪽을 우물거리며 집을 나선다.


11시. 치과에 들렀다. 얼마 전 치료한 치아가 왠지 욱신욱신 아파서 살펴보기로 했다. 수십개의 치아들 중 하나가 아플 뿐인데 삶의 질이 수직하강한다. 다행히 진료가 금방 끝났고 통증도 사라진 듯하다. 다음주 예약을 확인하고 돌아간다.


11시 30분. 다시 집. 남편이 거실에 앉아 있다. 집에는 수리 기사님이 와 있다. 어제 음식물쓰레기처리기가 고장났다. 모터값과 출장비로 8만원이 나갔다. 가습기도 고장나서 수리를 맡겼는데 일주일이 넘도록 감감무소식이다. 남편이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는데 뭔가 순조롭지 않은 모양이다. 내 가습기 내놔라 이놈들아! 언제까지 빨래를 널고 물을 끓여야 하냐고!


식탁 의자에 아이의 새 목도리가 걸려있다. 어제 문화센터에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아온 것이다. 니트 소재이기도 하고 하나만 세탁기에 돌리기가 뭐해서 조물조물 손빨래를 해서 널었다. 내친 김에 빨래건조대에 널린 침구도 정리한다. 어젯밤 개어 책상 의자에 쌓아둔 수건들도 치운다. 춥긴 하지만 거실과 안방 창문을 모두 열어 환기해준다. 당근마켓에 판매상품을 업로드하고, 아직 팔리지 않은 상품의 가격을 낮춰 끌어올리는 것도 짬짬이 해치운다.


12시 30분. 커피를 내려 컴퓨터 앞에 앉았다. 밥을 제대로 못 먹었지만 벌써 오전이 다 지나갔다는 생각에 왠지 초조해 입맛이 없다. 부동산 정보 사이트에 잠시 접속해 보지만 소득은 없다. 벌써 두 달째 상가를 찾고 있는데 매물이 마땅치 않다. 남편과 새로운 사업을 준비 중인데, 워낙에 불경기라 임대료 지출을 최대한 줄이려고 조심스레 알아보고 있다. 우리 동네는 신도시라 상가 임대료가 굉장히 비싸다. 하다못해 올리브영도 메인 상권 임대료를 감당 못해 구석진 자리로 옮겨갔다. 장사가 안 돼서 공실이 생겨도 임대료는 좀처럼 내리지 않는다.


지난주에도 대여섯 군데 임장을 했지만 와닿는 곳이 없었다. 인연이 될 공간을 만나면 확 느낌이 올 거라고 생각하지만, 진척이 없으니 기운이 빠진다. 장사가 잘 될지 안 될지도 확신이 없다. 경기가 워낙 안 좋고 조만간 좋아질 것 같지도 않으니, 그냥 하지 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가만히 있는 게 돈 버는 걸지도. 장사하느라 힘들어서 밥 사 먹고 이래저래 돈으로 때우느니 살림을 알뜰하게 하고 생활비를 절약하는 게 더 남는 장사일지도.


그렇다고 진짜 가만히 있어야 하나. 뭐라도 하고 싶다. 우리 부부는 각자의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지만 몇 년간의 운영으로 안정이 된 상태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간 사이에 대부분의 일을 처리할 수 있고, 오늘처럼 출근하지 않는 날도 꽤 있다. (아이를 데리고 일하러 가야 하는 주말도 있지만.)


시간이 많다는 건 무척 좋은 일이다. 아이가 자라는 것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내 손으로 따뜻한 밥을 지어 먹이는 기쁨이 있다.


하지만 이대로 머물러 있고 싶지는 않다. 육아와 살림이 싫은 건 아니지만 그것만 하고 싶지는 않다. 살림은 때로 모래성 같다. 아이의 장난감을 종류별로 바구니에 담아 정리하고 전면책장에 예쁘게 책들을 전시해 보지만 채 하루도 못 가 와르르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애써 쌓아봤자 모래성일진대, 채 그러모으지도 못한 하루하루는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린다. 치아와 가전제품을 고치고 빨래를 정리하고 당근 거래만 해도 지나간단 말이다. 아직 크리스마스 모임을 위한 장도 못 봤고 엊그제 당근해온 아이 교구도 닦아야 하고 화장실 청소도, 아 고양이 화장실도 치워줘야 하는데 말이다.


그나마 서울에 살 때처럼 길에다 버리는 시간이 거의 없는 생활인데도 늘 시간이 빠듯하다. 풀타임 워킹맘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걸 다 해내는 거람? (어느 하나는 포기하고 대충 한다거나,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는 답을 들었다)


2시 30분. 벌써 두 시간이 지났다. 우물쭈물 하다가는 곧 하원 시간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소중하지만 단단히 쌓아올리는 성취도 이루고 싶다. 그래서 억지로 운동복을 입고 밖으로 나가고, 애써 침대를 외면하며 책상 앞에 앉는다. 뭐라도 해야지. 뭐라도 써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꽤나 능숙한 주부가 되었다는 기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