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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라이 Dec 29. 2023

나만 나쁜 년이지 또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다니고 있는 필라테스 회원권 기간이 끝나 간다. 횟수가 10회 정도 남으니 데스크에서는 친절하게도 재등록을 권유한다. 이 센터는 강사님들도 잘 가르치고, 시간대도 나랑 맞고, 가격도 좋고 다니는 내내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다른 필라테스 센터도 몇 군데 다녀봤지만 우리 집에서 꾸준히 다니기에는 여기만한 데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재등록 권유가 몹시 성가시고 집요하다는 점이다. 수업이 끝날 때마다 "회원님 재등록 안 하실 거예요?"부터 "데스크에서 상담해 드릴게요" 등등. 요즘 좀 바빠서 조금 쉬었다가 재등록을 할 거라고 말했지만(진짜로 그럴 생각이었는데) 내년부터 가격이 오른다, 지금 등록해야 이득이다 등등등. 나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회원들에게도 그러기 때문에 데스크를 지날 때마다 난감한 표정으로 붙잡혀 있는 얼굴들을 본다. 아 불편해.


이렇게까지 심하게 영업하는 필라테스 센터는 또 처음이다. 피트니스 센터와 같이 운영해서 더 그런가 싶다. 한 다리 건너 아는 분은 워낙에 운동을 좋아해 쉬지 않고 필라테스를 다니시는데, 이곳의 지나친 영업이 너무 부담스러워 남은 회원권을 포기하고 다른 센터로 옮기셨다고 한다. 나 역시 회원권이 끝나갈수록 운동하러 갈 때마다 '오늘은 또 누가 어떤 멘트로 나를 붙잡으려나' 하는 예기불안에 시달린다. 기분 좋게 운동하고 상쾌한 몸과 마음으로 센터를 나서곤 했는데 이제는 약간의 불안, 초조, 짜증을 데리고 센터를 드나든다.


결국은 볼멘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오전 운동이 끝나고 예의 지나치게 쾌활한 목소리로 "회원님~ 내년부터 가격 올라요~!" 하는 원장에게 결국 한 마디 했다. 좀 지나치신 것 같다. 제가 1, 2월에는 좀 바쁠 거라 시간 날 때 재등록 하려고 한다. 너무 푸시하지 마시라.


원장의 떨떠름한 표정을 뒤로 하고 센터를 나왔다. 틀린 말도, 나쁜 말도 아니고 내가 할 말을 한 것 뿐이었다. 하지만 그닥 마음이 편치 않았다. 떨떠름한 얼굴 때문이었으리라. 불편을 끼쳐 미안하다는 사과가 아니라, '(다른 회원님들은 아무 말 없으시고 심지어 재등록도 척척 하시는데) 뭐 그렇게 까칠하시냐'는 듯한 그. 할 말을 해서 속이 조금 시원해진 듯했으나 그만큼 또 다른 종류의 불편감이 찾아왔다. 나 혼자 세상 예민하고 까칠한 사람, 심지어 나쁜 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버린 거다.


그냥 말을 말 걸 그랬나. 몇 번만 더 가면 되는데 그냥 참고 넘어갈 걸 그랬나. 그런데 내가 돈 내고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이런 불편을 왜 감수해야 한담. 누군가는 한 마디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최근에 또 비슷한 일이 있었다. 크리스마스 날 우리 집에 남편 쪽 가족들을 초대해 홈파티를 열었는데, 오기로 한 손님 중 한 사람이(A라고 칭하겠다) 전날 갑자기 어떠한 사과나 양해도 없이 "우린 못 갈 수도 있으니 음식 많이 준비하지 마"라고 통보한 것이다. 이미 케이터링을 불러 놓아 취소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고 A도 그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불참도 아니고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라며 확실한 답을 안 주는, 호스트로서는 제일 짜증나는 상황. 그럼 A가 준비하기로 한 케이크는 어떻게 되는 거냐는 내 질문에(A가 안 오면 다른 데서 구해 와야 했으므로) 답변도 없자 나의 갑갑함과 분노는 그라데이션으로 치솟았다.


결국 나는 "못 오시는 걸로 알겠다"고 메시지를 남기고 더이상 A를 초대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남편에게는 A를 우리 집에서 보고 싶지 않으니, 적당히 다른 말로 둘러대든 내가 개빡쳤다고 말하든 아무튼 A가 오지 않게 단도리 하라고 일렀다. 그러나 남편은 중간 역할을 잘 하지 못했고(...) A는 끝까지 내 메시지를 씹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뒤늦게 적극적인 참석 의지를 밝혔다. 결국은 크리스마스 당일 아침부터 내가 직접 더이상 우리 집에는 A의 자리가 없다는 뜻을 전해야 했다.


나중에야 남편 및 다른 가족을 통해 듣게 된 일말의 상황 설명은 어처구니 없지만 이러했다. A가 원래 갑자기 약속을 파토내는 일이 잦고 도무지 고쳐지지가 않아서 남편의 가족들은 이미 A를 깍두기처럼 여기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이미 익숙하고 무뎌져 있어서 그러려니 했다는 거지. 내 속이 뒤집히고 있다는 건 모르고. 하지만 나는 이렇게 경우 없는 상황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고. (갑작스런 불참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나, 내게 어떠한 사과나 양해, 하다못해 설명조차 없고 내 카톡에는 답을 안 하고 인스타 스토리 올리고 있었다는 것이 빡침 포인트)


결국 우리는 A 없이 모였고, 아무도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으나 은근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A로 인해 스트레스 받은 내게 미안함을 느낀 다른 가족이 대신 케이크와 와인을 사 왔고, 준비하느라 수고했다고 용돈도 많이 주고 갔다. (ㅠㅠ) 배려 및 예의가 부족하긴 했으나 아무래도 악의는 아니었던 A는 나에게 장문의 사과 카톡을 보내왔다. 하. 결국 또 나만 나쁜 년이네 이거.


물론 아무도 나에게 나쁜 년이라고 하지 않았고, 당황스런 상황을 미처 중재하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해 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상황을 물 흐르듯 넘기지 못하고 굳이 '지적질'한 스스로를 자책하며 혼자 땅 파고 있는 중이다. 둥글둥글한 게 최고고, 모난 돌이 정 맞는 세상에서 30+n년을 살아왔으니 그럴 만도 하지 않겠는가, 에휴. 이렇게 뒤돌아 마음쓰고 끙끙 앓을 바에 처음부터 말을 말걸, 한 번 더 참아볼 걸 그랬나. 아 그런데 그것도 또 나름 속터질 노릇이었을 거 같다. 그때로 되돌아가도 아마 난 똑같이 말하고 행동했겠지.


할 말은 해야겠는데 미움받기는 싫은 마음. 상반된 욕심들로 속이 시끄럽다. 슬프지만 누군가는 악역을 맡아야 한다. 다만 뒤돌아 땅 파는 일을 줄이기 위해서는 말하기 전에 공복이 아닌지 점검하고, 탄수화물을 얼마나 먹었는지도 따져보고(매우 중요), 마그네슘도 꼬박꼬박 챙기기로 다짐한다. 뾰족하되, 날카롭지는 않은 말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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