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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Nov 01. 2023

코앞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금요일의 퇴근길이었습니다. 여름이라면 한낮처럼 밝은 시간이었을 텐데 요즘은 해가 무척 짧아져 벌써 어둑합니다. 일주일 동안의 피로가 몰려와 얼른 집에 가서 푹 쉬고 싶은 마음에 발길을 재촉했어요. 드디어 아파트의 공동 현관에 들어섰습니다.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먼저 기다리던 한 가족이 탑승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이제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만 누르면 우리 집 현관문 앞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서둘러야겠어요. 하나, 둘, 셋 딱 세 걸음만 더 가면 저도 저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어요.

  '여러분, 빨리 갈게요. 하나, 두우...'

  코 앞에서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습니다.


치...... 봤으면서 기다려주지도 않고 가버리냐?


  엘리베이터가 한 층을 올라간 것을 확인하고 올라가는 버튼[▲]을 눌렀습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려고 하는 찰나에 버튼을 눌러 문이라도 열리면 매우 어색한 공기가 좁은 엘리베이터를 감돌 것 같아서입니다. 엘리베이터가 위층을 향해 떠나버리니 차라리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기다려주지 않고 얼른 문을 닫고 떠난 사람들에 대한 섭섭(할 일이 아니지만 그러)한 마음이 사라졌어요. 충분히 그럴 수 있으니까요.


  이른바 '코시국'이 되기 전에는 엘리베이터를 탈 때 바빠서 미치는 일을 하는 중이 아니라면 문이 자동으로 닫힐 때까지 여유롭게 기다려주었고,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보고 누군가가 급히 뛰어온다면 다시 문을 열어 기다려주는 여유가 저에게는,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있었습니다. 코로나19가 가져온 경계와 단절은 많은 부분에서 회복되었지만 적어도 엘리베이터 생활에서는 남아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따지고 보면 몇 층에 누가 사는지 모르고, 더 넓게는 누가 이웃인지 모르니 공동 현관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간혹 눈이 마주치면 '안녕하세요' 인사를 나누는 낯선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니 엘리베이터 안에서 낯선 사람과 보내는 어색한 몇 초보다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게 훨씬 편해집니다. 저도 낯선 아저씨(!)가 공동 현관 입구로 걸어 들어오는 것이 보이면 얼른 [닫힘] 버튼을 누릅니다.



  오늘은 새벽에 볼일이 있어 잠시 나갔다 왔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말이죠. 기다리던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문이 열렸어요. 그리고 엘리베이터에 탔죠.

  '제가 타기 바로 직전에 이 엘리베이터는 누가 탔을까요?'

  과하지 않은 진한 향수의 향이 엘리베이터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일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생각했어요. 향기는 기억을 오래 상기시켜 주는 요소 중의 하나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향에는 떠오르는 사람이나 추억은 없었습니다. 다만 언젠가(아마도 면세점이나 백화점에서 시향 테스트를 하며) 맡아본 적은 있는 것 같습니다. 문득 몇 층에 사는 사람일까, 매일 뿌리는 향일까, 어떤 옷을 입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종종 다른 집으로 배달 가던 치킨의 흔적만 맡던 엘리베이터에서 오늘은 드디어 사람의 향기를 맡은 기분입니다. 그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진한 향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제주로 온 뒤 2년 동안의 타운하우스 생활을 마치고 아파트로 이사를 왔지만 1년이 넘도록 여전히 '적응 중'인 상태입니다. 여름이면 콩국수를 삶아 엘리베이터를 타고 고층부터 내려오며 배달을 하고, 가을이 되면 햇과일을 박스로 사서 나눠 먹으며 정을 키우던 과거의 아파트 생활은 아주 먼 옛날이야기가 되었고, 이웃에 누가 살고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누군가의 흔적에 '함께 살고 있구나!' 반가워하는 그런 아파트 생활을 하고 있어요. 코로나가 바꾼 풍경인지, 원래의 풍경인지 알 길은 없지만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그제야 긴장이 풀리며 편안해집니다. 고요한 기분을 주는 공간이 있다는 것에도 만족하고 있고요.

  그래도 오늘 아침에 새겨진 향기 덕분일까요, 이제는 공동 현관에서 만나는 이웃들과 적극적으로 인사를 나누고 엘리베이터도 여유 있는 마음으로 타는 이웃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운 시절이 있다면, 변화될 수 있는 일이라면 제가 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기쁘게 해 보는 것이지요.

  그럼 이제 얼른 씻고 외출 준비를 해서 엘리베이터를 타러 갑니다.


  (사진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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