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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Nov 08. 2023

시간이 하는 일

 올해도 어김없이 고구마의 계절이 왔습니다. 해마다 아침 기온이 뚝 떨어질 때면 올케의 부모님께서 한 해 동안 애써 키운 고구마를 한두 박스씩 보내주십니다. 고구마의 품종은 잘 모르지만 보내주신 고구마는 밤고구마와 물고구마의 중간쯤에 있는, 아주 달고 촉촉한 고구마인데 가족이라서가 아니라 진짜로 이제껏 먹어 본 고구마 중에서 가장 맛있는 고구마입니다. 잘 여문 고구마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경북 안동시 와룡면의 맑고 깨끗한 자연이 깃든 기분이라 매년 가을이 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귀하게 받고 있습니다.


  살림에서 삶의 즐거움을 찾았던 시절에는 가을이 되면 무척 바빴습니다. 고구마가 박스로 오면 매일 굽거나 찐 뒤 다시 손가락 크기로 썰어 건조해 냉동실에 갈무리해 두는 것이 1년의 시간을 바친 정성에 보답하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러고 보니 그때에는 고구마뿐만 아니라 사과, 배, 대봉감, 귤을 박스로 사서 겨우내 두고 먹을 간식부터 여름을 책임졌던 보리차와 옥수수차 대신 끓여 먹을 버섯과 무도 건조해 놓았네요.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대개는 자기 전에 건조를 시작해서 자고 일어나 바쁘게 유치원을 보내고 돌아오면 건조가 끝나 있는 경우가 많긴 합니다. 그러면 다시 재료를 손질하고 찌거나 구워 저녁에 건조기로 넣을 준비를 하지요.


  집에서 건조해 만든 간식은 정말 맛있습니다. 가장 맛있는 것은 대봉감말랭이였고, 그다음은 고구마말랭이였습니다. 원래는 고구마말랭이가 부동의 1위였는데 시골에 사시는 친구의 할머니께서 가을볕에 사나흘 동안 말린 고구마말랭이를 해주신 뒤로 순위가 확 바뀌었습니다. 대봉감말랭이에 밀렸지만 그래도 고구마를 먹는 방법 중에서 가장 맛있는 것은 고구마말랭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 고구마에 김치를 얹어 먹을 때보다 +1이 더 맛있습니다. 특히 집에서 만든 고구마 말랭이는 시중에 파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맛있어요. 멈출 수가 없거든요.


  올해는 찐 고구마를 먹을 때마다 유난히 고구마 말랭이가 먹고 싶어 집니다.

  '이번에는 건조를 시켜 볼까?'

  생각을 했다가 찐 고구마를 예쁘게 잘라서 가지런히 건조기 채반에 올리고 7~8시간을 건조할 과정을 하니 머리가 어질 합니다. 게다가 제가 가진 건조기는 4층으로 되어 있는데, 중간에 적당한 타이밍을 보며 채반의 층을 바꿔 주어야 너무 말라비틀어지거나 너무 무르지 않는 비슷한 식감의 고구마말랭이를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번거로움 +1도 추가됩니다. 아무튼, 고구마 말랭이가 먹고 싶지만 직접 만들 생각을 하니 '만들어 볼 결심'이 사르르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고 보니 올해 1년을 되돌아보니 시간이 하는 일을 외면하면서 살기도 했네요. 특히 먹는 것에서는 휘리릭 만들어서 후다닥 먹을 수 있는 메뉴나 타인의 손맛과 배달하는 민족에 기대어 살았네요. 제 손으로 시간을 들여 따뜻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대신에 말이죠. 그나마 일과 육아 등 사람을 대하는 일에서는 그러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아이들에게 좋아하는 음식을 물으면 여전히 '엄마가 만든' 치킨, 수육, 냄비 솥밥 등 가장 먼저 말해주니 올해는 요리 공백이 있긴 하지만, 그동안 부엌에서 뒷모습을 보이던 엄마의 시간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이번 주말에는 2024년과 앞으로 시간을 계획해 보는 꿈 지도, 인생 로드맵을 다시 꾸려볼 계획입니다. 월트 디즈니의 로드맵은 '디즈니 레시피'라는 달콤한 이름으로 불러던데 저도 '무지개인간 레시피'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작년 이맘때에도 2023년 로드맵을 작성했지만 연초에 생각지 못했던 일로 계획을 추진하는 방향으로 놓기에는 타격이 무척 컸습니다. 그래서 현실과의 간극을 좁혀가며 꿈을 수정하고 방향을 잡아보려고 해요. 계획한 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무척 괴로운 일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단 몇 % 라도 달성했고, 달성하려고 노력하며 살았다는 것은 안심이 되는 일이기에 또 용기를 내어 계획을 세워봅니다. 다시 시간이 하는 일을 믿어 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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