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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Nov 21. 2023

뜻밖의 중간정산

  ※ 이번 글에는 대놓고 자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이곳이 무지 개(인) 공간의 브런치스토리가 아니라 '대나무숲'이라고 생각해 보렵니다. 왜냐하면 하면서도 참 조심스러운 자식 자랑을 좀 해보려고 하거든요. 그래도 이번에는 꼭 해보고 싶습니다. 사춘기답지 않게 예쁜 말을 건네는 아이가 자랑스러워서요.





  지난달, 춘기는 중학교에서 첫 시험을 치렀어요. 초등학교에 입학 후 받아쓰기는 물론 숙제도 없는 즐거운 초등 생활을 한 '행운아'인 춘기에게 중학생이 되어 치른 인생의 첫 시험은 어떤 의미로 기억되었을까요?

  춘기의 학교에서는 시험이 종료되면 당일 혹은 익일에 정답을 공지해 가채점을 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오호, 가채점을 했는데 수학이 100점이래요! 춘기는 지난 1학기에는 방황도 하고, 반항도 하더니 여름 방학을 기점으로 자신감을 찾고, 조금씩 자신에게 맞는 길을 내고 있는 모습입니다. 다행히 마킹 실수 없이 OMR카드를 잘 작성했고, 수학 성적도 가채점 결과와 똑같이 나왔어요. 학교 수업을 충실하며 해낸 것이 참 대견합니다.


  춘기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했습니다. 자신의 꿈을 정확하게 찾은 이후로는 흔들리지 않고 노력하는 모습이 무척 자랑스러웠거든요. 그럴 때마다 춘기는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고, 잘 챙겨줘서 고맙다는 말로 다시 감동을 줍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특한 춘기의 엄마는 '장난꾸러기'입니다.


  "그게 다 엄마가 잘 낳은 덕분이야."

  "응! 엄마, 고마워."

  (손바닥을 내밀며) "내놔. 공짜는 없잖아."

  "그럼, 얼마면 되는데?"

  "맛있는 커피를 사줬으면 좋겠어."

  "그래!"

 

  그리하여 계획에도 없던 '양육 중간 정산'을 했습니다. (누가 손해인지 모르겠지만)만 13세가 된 춘기와 보낸 희로애락의 시간을 '맛있는' 커피 한 잔으로 퉁치기로 했지요. 

  고심 끝에 고른 우리 동네 카페는 오늘의 정산에 딱 어울리는 이름을 가진 <컴플리트 커피>입니다.

  


컴플리트 커피 @무지개인간


  Complete!

  오늘따라 더 완벽합니다.


컴플리트 커피 @무지개인간


  둘이서 먹은 것 치고는 좀 많죠? 테이블이 꽉 찼어요.

  하지만 이 디저트들이 옹기종기 모인 것에는 이유가 있답니다.

  먼저 맛있는 아메리카노는 잘 낳아주고 키워준 엄마에게 드리는 춘기의 선물, 말차라테와 시즌 메뉴인 무화과푸딩(투명 용기)은 춘기가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 앞으로도 서로를 끌어주며 살자는 티라미수와 옆 테이블에서 먹기에 맛있어 보여 주문한 스콘 그리고 내일 아침에 홈카페로 먹을 귀여운 스콘까지 모두 이유는 있어요.

   


  커피가 맛이 있는지 없는지, 양육 중간 정산의 마지막 점검을 하기 전에 티라미수로 결의를 다집니다.


  "앞으로도 사이좋게 지내자!"

  "응, 사랑해."


  역시 기분 좋은 달달함이 입 안을 가득 채웁니다. (평소에도 저는 이곳의 티라미수를 무척 좋아합니다.)

  이제 커피도 한 모금, 두 모금. 


  아, 행복해! 

   

  정말 행복해요. 

  등 센서를 달고 태어났는지 24시간을 안고 재워야 했던 갓난아기시절, 머리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굽혀 타요 붕붕카에 밀며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했던 못 말리는 서너 살, 아침마다 양말이 마음에 안 드니 옷이 불편하니 성질을 부리던 여섯 살, 초등학교 입학을 2개월 앞두고 아무리 가르쳐도 한글을 못 읽어 복장이 터질 뻔했던 일곱 살, 영어 공부는 하기 싫다던 여덟 살, 발표하는 게 싫다던 아홉 살, 유튜브와 모바일 게임에 빠져 엄마 속을 시꺼멓게 태웠던 열한 살, 열두 살, 열세 살 그리고 열네 살 반. 이 모든 것을 잊고 새로운 사랑만 채울 수 있을 정도로 행복한 마음이 저절로 들었어요.


  행복하지요. 동시에 일찍부터 공부를 시켰다면 지금쯤 자신의 능력을 더 끌어올릴 수도 있을 텐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답니다. 이내 부모의 마음이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휙, 날려 버렸지만요. 대신 도서관과 그림책방을 다니며 열심히 책을 읽어주며 함께 쌓은 추억이 남았으니까요. 늘 그렇듯 삶에는 내가 가본 길은 언제나 하나뿐이지만 가지 않은 길은 여러 갈래로 더 많으니까요. 공부할 시간을 훔쳐 책을 통해 더 멋진 세상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날 밤, 춘기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네며 잘 자라줘서 고맙다는 말을 했어요. 이번에는 장난꾸러기 춘기가 반격에 나섭니다.

  

  "엄마, 갑자기  일본식 장어 덮밥의 소스가 먹고 싶어."

  "소스?"


  히츠마부시 소스를 어떻게 만드는지 검색해 볼까, 시판 소스를 찾아볼까 잠시 고민을 하다가 춘기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춘기도 지금까지 잘 자라줘서 고마워. 우리 장어 덮밥 먹으러 가자."

  "그래, 좋아!"

 

  소스만 밥에 비벼 먹을는지 장어도 함께 먹을는지 모르겠지만 장어 덮밥 소스가 먹고 싶은 춘기를 위해 장어 덮밥을 사줄 요량입니다. 이번에도 누가 손해인지 정말 알 수가 없지만 말입니다. 얼떨결에 잘 낳아줘서, 잘 자라줘서 고맙다는 '말말 교환'을 했고, 어쩌다 보니 중간 정산도 했습니다.

  다음 중간 정산은 춘기가 사춘기를 딛고 쑥쑥 자라 스무 살에 되면 칵테일을 사주려고 합니다. 그날은 아직  멀게 느껴지지만 행복하게 기다릴 수 있어요. 이번에는 저는 또 무엇을 받아야 하나 6년 동안 신중하게 고민을 좀 해보아야겠습니다.

  



※ 히츠마부시는 애월에 있는 일식당에서 먹었습니다. 정말 맛있었어요.

  춘기의 그릇에 담긴 장어구이도 춘기의 뱃속으로 잘 들어갔더라고요.


제주나기 @무지개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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