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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May 23. 2024

2030년 5월 7일 결근 예정입니다

아마도

  얼마 전에는 독서교실에서 함께 일하는 선생님의 아들이 입대를 했습니다. 청년이 입대하기 전에 보내는 마지막 주말이 되자 저는 표현할 수 없는 허전함이 차오르더라고요. 제가 낳은 것도 아닌데 이렇게 호들갑입니다. 요즘은 '라떼 시절'에 비하면 군 생활이 훨씬 편하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갓 어른이 된 청년들이 더 넓은 세상을 만났으면 하는 시기에 사회와 분리되어 특별한 신분으로 살아가야 하는 점이,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저는 헤아려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군 생활은 정지된 시간이 아니라 제자리걸음을 하며 인생 전체를 그려보는 시기가 되면 좋겠다는 거창한 생각을 해봅니다. 아무튼 그 청년은 씩씩하게 입대했다고 합니다.




  어린이날이 낀 연휴를 보내고 평소처럼 독서교실의 문을 열었습니다. 하교 시간이 되자 귀여운 어린이들이 입장을 합니다. 여느 날과 같은 환영을 받고 등원을 하지만 더 어린 시절, 본능에 의지해 세상을 배웠던 어린이들은 미묘한 변화를 잘 찾아냅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고개를 꺄웃하더니 제게 다가와서는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네요.


  "봄 선생님은 왜 안 오세요?"

  "봄 선생님은 오늘 어디 가셨어요?"


  정말로 어린이들이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은 참 대단합니다. 저희 집에 계신 분(?)은 그렇지 않던데 말이죠. 이런 능력은 어른이(되기 전 사춘기 즈음)되면서 점점 퇴화하는 감각인가 의심을 해봅니다. 여하튼 어린이들은 선생님께서 잠시 자리를 비운 게 아니라 날이 시작될 때부터 책상 하나에 사람의 온기가 없었다는 것을 귀신같이 잘 찾아냅니다. 이쯤 되니 이 맑고 순수한 영혼들에게 선생님의 부재의 이유를 바르게 알려도 될까 고민이 되네요.


  선생님의 아들이 오늘 군대에 갔어요.
그래서 지금은 논산훈련소에 계실 것 같아요.



  어린이들에게는 아주 먼 세계인 '군대'를 쿵! 하고 발 밑에다 떨어뜨린 어른이 된 것 같습니다. 문득 제게 '군대란 말이야'를 알려준 친구의 허풍이 떠오릅니다. 훈련소 앞 매점에서 총과 군복, 군화 등을 파는데 늦으면 성능이 떨어지는 걸 사거나 못 사는 일이 생기니 사격을 잘해서 휴가라도 나오려면 일찍 가서 매점 앞에 줄을 서야 한다는 거짓말이었죠. 그런데 그때는 진짜인 줄 알았지 뭐예요? 그날의 갑절을 살아 사십 대가 되어도 군 생활에 관한 지식이 해박하진 않습니다. 이럴 때는 고무신 경력이 없어서 그렇다고 이유를 붙여보며, 어린이들에게 더 알려주지 못해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훅 끼어든 희준의 질문에 웃음이 빵! 터지고 말았습니다.  


  그럼 군대는 여자만 갈 수 있어요?

  

  아무래도 남자 어린이인 희준은 반만 들었나 봅니다. 하필이면 자신에게도 중요한 사실인 '아들'을 놓치고 말았네요. 다시 희준에게 (자네도 어김없이 가게 될) 군대를 알려줘야 하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용기를 내 희준이가 아직 모르고 있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알리기로 했습니다.

  "희준아, 우리나라 남자라면 의무로 가야 하지만 아직까지 여자들은 지원해서 갈 수 있단다."

  희준이 되묻습니다.

  "그럼, 저도 가야 해요?"

  "만 18세가 된 우리나라 남성은 군대를 가야 해."

  갑자기 얼굴이 흙빛이 된 희준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리고는 책 속에 머리를 파묻고 읽기 시작합니다. 아무래도 이 사실을 태어나서 처음 들은 것 같습니다. 오 분이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다시 제 옆으로 오네요. 비록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라도 어떤 것은 자꾸만 궁금해질 때가 있으니까요.

  "만약에 군대를 가기 싫으면 어떻게 해요?"

  아직 멀었으니 우리나라의 국방 상황을 좀 지켜보자고 말해 봅니다. 이 질문은 10년째 받고 있지만 여전히 대답하기가 곤란합니다. 아이들의 간절한 눈 속에 냉정한 현실을 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사실적인 정보를 더 많이 접하는 요즘 어린이들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더더욱 없고요. 결국 우리는 함께 병무청 누리집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럼 선생님도 그날 결석할 거예요?

  이번에는 가만히 지켜보던 혜원이 물어봅니다. 지난주에 중간고사를 치른 '우리 집 아들 (사)춘기'가 독서교실에 잠깐 들렀는데 그때 오빠가 선생님보다 키가 더 크네요라고 말했던 혜원이가 춘기를 떠올렸네요.

  '어머나, 아직 나는 마음의 준비도 못 했는데...'

  독서 교실에서는 평소에도 어떤 질문이라도 반갑게 대답을 해주는 분위기입니다. 이번에도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뻗은 질문이지만 어린이들과 지내다 보면 재치와 순발력이 부쩍 늘더라고요.

  "선생님은 아들을 군대 보내려면 5년 정도 남았으니까 지금부터 오빠를 독립적으로 키울까요?"

  "그래서 '군대쯤은 혼자서 갈 수 있잖아'라며 어깨를 토닥토닥해 주고 혼자 군대에 보낼까?"

  토끼처럼 동그란 혜원의 눈이 웃기다며 반달이 되는가 싶더니 "그건 좀..."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군대가 뭔지 모르는 어린이들에게도 그날은 함께라야 좋다고 생각되나 봅니다.

 

  선생님도 그날 다녀오세요.

  

  5년 뒤 중학교 3학년이 되는 혜원을 독서교실에서 '여전히'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혜원은 고맙게도 미리 <결석계>를 결재해 주었습니다.

  "맞아요. 선생님도 결석하면 좋겠어요."

  "그날은 특별히 문을 닫을까요?"

  옆에 있던 어린이들도 얼떨결에 결석을 구두 결재하며 공식화합니다. 심지어 특별 휴원으로 자유 시간까지 챙기려고도 하고요.


  오예! 고마워요, 어린이들!

  그날 저녁 식사 테이블에서 춘기에게 오늘의 일과 함께 훈련소 입소식에 갈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중간고사가 끝나 놀멍쉬멍('놀면서 쉬면서'라는 뜻의 제주어) 생각만 있는 춘기는 무표정하게 눈만 껌벅거리며 쳐다봅니다. 고등학교 고민이 가장 큰 춘기는 군대까지는 미처 생각해 보지 않았나 봅니다.

  "그래도 안 가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은데..."

  아! 엄마는 훈련소 앞에 함께 갈 결심을, 독서 교실의 어린이들은 오빠가 군대 가는 날이 오면 휴원을 할 각오까지 해 놓았는데 정작 입대를 해야 하는 춘기는 안 갈 방법을 물어봅니다. 독서 교실의 아홉 살 희준이와 춘기가 만나면 딱 좋을 것 같습니다.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안 갈 방법을 찾아내든,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든 무슨 수가 나겠지요.


  다음 날 아침, 식탁에 앉자마자 춘기가 수줍게 부탁을 합니다.

  "그래도 혜원이에게 결석을 허락해 줘서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지난밤에 춘기는 무슨 꿈을 꾸었는지 재미있는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여유가 생겼네요. 엄마인 저는 몇 년이나 남은 입대를 미리 걱정하기보다 춘기가 지금과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회피하고 싶고 모르는 척하고 싶은 감정이 있더라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며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의 공간을 잘 지켜내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이번에도 평범한 일상 속에서 아이들을 통해 인생을 배운 것 같습니다.

  고마운 독서교실의 친구들과 사랑스러운 춘기야, 지금처럼 잘 자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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