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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Jun 01. 2024

아빠를 닮고 엄마를 담은 아이


선재야, 글씨가 정말로 예쁘구나!


  늘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 독서 교실에 오는 어린이들은 다 예쁩니다. 그중 선재는 국어사전 찾는 법을 가르쳐주었더니 매시간마다 뜻을 모르는 낱말을 정리하는 등 열정과 마음가짐까지 예쁜 어린이입니다.  예쁜 마음은 예쁜 글씨를 낳습니다. 오늘도 선재는 한 글자씩 정성스럽게, 또박또박 쓴 활동지를 보여줍니다. 어른들은 그렇잖아요? 예쁜 글씨를 보면 눈에서 '하트'가 먼저 튀어나옵니다. 그리고 미루거나 주저하지 않고 꼭 어린이들에게 칭찬을 말과 글로 건넵니다.

  선재도 "우리 엄마가 글씨를 예쁘게 써요."라고 알려줍니다.


  요즘 선재는 독서교실에 온 새로운 친구를 좋아합니다. 매일 등원하는 새 친구는 바로 여름이 되면 나타났다 가을이 되면 사라지는 호랑나비의 애벌레이지요. 독서 교실 어린이들에게는 알에서 나온 애벌레가 허물을 벗고, 번데기가 되었다가 자신의 손바닥만 한 호랑나비가 되는 한살이를 관찰하는 게 신기하고 놀라운 경험이고, 독서 교실의 선생님은 취미 생활을 일터에서도 이어갈 수 있어서 즐겁습니다. 물론 11년째 나비를 키워 자연에 돌려보내며 어린이들이 더 오래 예쁜 나비를 만날 수 있게 생명을 지켜내는 어른의 의무를 다한다는 다소 거창한 생각을 스스로 하고 있다 해도 그저 즐거운 취미입니다.


허물을 벗고 있는 호랑나비 애벌레 @무지개인간


  호랑나비 애벌레가 독서 교실로 등원하는 것을 사람만 좋아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한국말은 못 하지만 호랑나비 애벌레도 인간들이 보내준 사랑에 그들만의 방식으로 응답해 줍니다. 예를 들자면 오늘처럼 어린이들이 등원하는 시간에 딱 맞춰 허물을 벗는 장면을 보여준다거나 "왜 안 움직여요?"라는 질문을 하는 어린이를 위해 몸을 일으켜 잎을 갉아먹는다거나 묻지는 않았지만 궁금해할까 봐 똥을 누는 모습까지 보여주는, 느낌적인 느낌으로 우리가 친한 사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아무튼 '인싸' 애벌레가 독서교실 어린이들에게 살아있는 자연 관찰 시간을 만들어줘서 얼마나 고마운지요.


  허물을 벗고 몸집이 커진 호랑나비 애벌레가 갑자기 자신이 벗은 허물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애벌레는 천적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허물을 먹는 거야."

  더 기억에 남는 관찰이 되도록 <세밀화로 보는 호랑나비 한살이> 책을 함께 읽어보길 권하는데 먼저 읽은 선재가 책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기억해서 말해줍니다.

  "선재가 잘 알고 있구나! 정말 기억력이 좋은데!"

  칭찬을 받은 선재가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대답합니다.

  "엄마 닮아서 그래요."

  "그러고 보니 선재는 엄마를 빼닮았네."


  '엄마를 닮은 선재'는 주로 아버지께서 데리러 오는 날이 많습니다. 처음에 선재 아버지를 뵀을 때는 깜짝 놀랐지요. 우리 선재는 '아빠의 미니미'더라고요. 겉모습과 목소리, 풍기는 이미지까지 선재와 아빠는 누가 봐도 부자 지간입니다. 그래서 지난겨울에는 이렇게 말했지요.

  "선재야, 선재는 아빠 닮아서 멋있구나."

  간혹 어린이들은 칭찬을 받으면 얼음이 되는 일이 있습니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을 하는지, 몰랐던 사실을 들어서 놀란 것인지, 당연한 것을 이제 알아주는 것에 서운한 마음을 느꼈는지 여러 이유로 얼어 버립니다.

  "오늘 로션을 안 발라서 그래요."

  얼음 땡! 얼었던 선재가 녹았습니다. 오늘 아침에 엄마가 로션을 꼭 바르라고 했는데 안 발랐더니 '엄마를 닮은 선재'가 아빠를 닮은 모습으로 등원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전 엄마를 닮았어요. 자꾸 사람들은 아빠를 닮았다고 하지만요."

  아빠를 닮았다고 할 때마다 엉뚱한 대답으로 엄마를 닮았다고 말하는 선재의 말이 오늘따라 참 깊습니다. 아마도 어려서 세밀하게 표현하지 못한 사랑이 들어있는 것처럼 말이죠. 선재는 사람들에게 아빠를 닮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아침부터 밤까지 많은 것을 알뜰살뜰히 챙겨주는 엄마의 마음이 떠올랐을 수도 있고, 혹시나 그런 이야기를 못 들은 엄마가 섭섭해하는 마음을 헤아렸을 수도 있습니다. 닮은 정도로 편을 나눠 아빠와 같은 편이 된 게 싫어서가 아니라 아직은 엄마가 더 큰 존재이고, 더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에 고맙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다른 어른들이 미루어 짐작해 주길 바라는 것이지요.


  제가 글을 쓰고 있는데 옆에서 우리 집 (사)춘기가 슬쩍 보더니 한 마디를 얹습니다.

  "엄마,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되지요."

  그렇지요. 엄마 닮았네, 아빠 닮았네라는 말보다는 선재는 그리고 우리 어린이들은 아빠와 엄마의 모습을 담고 태어난 아이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했네요. 이 지구에 나를 담고 있는 생명체가 살고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슴 벅차게 기쁜 일이지요. 어린이들은 더 좋은 사람으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게 만드는 기특한 존재들입니다. 우리 독서 교실의 부모님께서도 이렇게 생각하시겠죠? 갑자기 세상이 참 아름답게 보이는 주말 아침입니다. 이제 세상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느끼려고, 설레는 마음으로 외출 준비를 하러 갈게요.

  다정한 독자님께서도 행복한 주말을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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