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날씨가 너무나 덥습니다. 사실 제가 살면서 가장 두려워하는 게 기후변화인데, 이제는 지구가 펄펄 끓기 시작하는 것 같아요. 더워도 너무 더운 여름이라 가스불을 켤 결심을 미루고 미루다가 드디어 냉장고 속에 있는 남은 하지감자 네 알을 꺼냈습니다. 하지 때 산 감자니까 약 한 달이 넘도록 냉장고 속에서 겨울잠을 잔 셈이지요. 하지는 우리나라 24 절기 중에서 열 번째에 해당되는 절기로 낮의 길이가 가장 길고 밤이 가장 짧은 날입니다. 이 무렵에는 3, 4월에 파종해 6월 하순 무렵에 수확을 하는 감자가 제철이지요. 감자는 밑간을 해서 올리브오일에 구워 먹어도 맛있고, 감자전, 감자볶음 등 무엇으로 변신을 해도 참 맛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제철 행복> 김신지 작가님께 배운 건데 하지감자가 수확된 때부터는 마트에 파는 '포카칩'의 포장도 바뀐다고 해요. 바로 '생감자'에서 '햇감자'로 제철 감자칩을 만들지요. 진짜더라고요. 그래서 요즘 저는 편의점이나 마트에 가면 꼭 제철 햇감자칩을 한 봉지 골라와요.
냉장고 속에 있던 하지감자는 껍질을 벗겨 삶을 예정입니다. 두 알은 삶은 계란, 잘게 썬 사과를 넣어 감자샐러드를 만들어 샌드위치 속재료로 쓰고, 나머지 두 알은 삶은 감자로 먹을 겁니다. 고구마가 들으면 섭섭하겠지만 감자는 뭘 해도 다 맛있기 때문에 냄비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보다 보글보글 소리에 더 기대가 됩니다. 무더운 여름 아침, 30분 만에 모닝빵 샌드위치 여덟 개와 얼음 동동 아이스티, 요즘 빠진 아이스티 샷 추가, 사과 올리브오일 샐러드, 삶은 감자까지 후다닥 차렸습니다. 물론 사진은 없습니다. 이래서 요리 블로거는 될 수 없는 모양입니다.
한 상을 차렸는데 삶은 감자의 인기가 가장 좋습니다. 역시 제철 햇감자의 위력인가 봅니다. 엄마가 이 사실을 아시면 몸에 안 좋다고 말을 하셨겠지만, 삶은 감자는 설탕에 찍어 먹었습니다. 왜냐하면 저에게 설탕 '찍먹' 감자는 요리의 즐거움을 알려준 고마운 요리이기 때문이지요.
요리의 즐거움을 처음 느낀 그날은 바야흐로 국민학교 6학년의 여름이었지요. 학교에서 실과 시간이 되면 실과실(요리실)로 가서 6명씩 조를 나눠 수업을 들었어요. 이 시간에는 경단을 만들어 삶은 뒤 카스텔라 가루 고물을 묻혀 떡도 만들고, 밀가루 반죽을 밀어 모양을 내 타래과도 튀겼답니다. 다칠까 봐 조심하면서도 음식이 완성되는 즐거움은 집의 부엌으로도 옮겨졌어요. 그래서 학교에 다녀오면 어떤 재료가 있나 살핀 뒤 계란도 삶고, 감자도 삶아 보았지요. 그러다 하지 무렵부터는 감자 삶기에 푹 빠져버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까만 비닐봉지 안에 감자가 하도 많아서 삶았을 뿐인데, 엄마는 '오늘 오후에도 감자를 삶을 딸'을 위해 오전마다 사두신 것 같아요.
감각으로 배운 감자 삶기는 늘 실험적이었어요. 어떤 날은 오직 감자만 삶기도 했고 그다음 날은 소금을 조금 넣어보기도 했고, 소금을 넣었더니 맛있어서 더 넣어 보기도 했지요. '더, 더, 더'를 거듭하면 좀 짜다 싶은 날에는 설탕도 넣어보았지요. 감자를 삶는 물의 양은 또 어떻고요. 저수지를 만들어 팔팔 끓어 넘치기도 했고, 너무 자작하게 했다가 감자가 다 익기도 전에 냄비를 태우고는 엄마에게 뒤처리를 부탁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세상에 모든 경험은 쓸모가 있게 마련이죠. 이틀 연속으로 분이 나는, 엄마의 삶은 감자를 닮은 포슬포슬한 감자 삶기에 성공했어요. 이렇게 감자가 잘 삶긴 날에는 우리끼리만 다 먹으면 안 되죠. 동네 사람들에게 맛을 보여야 합니다.
당시 우리 가족은 2층 양옥집에 살았어요. 그리고 1층에는 문구점과 분식점이 있었지요. 속까지 잘 익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자를 젓가락으로 콕 찍어 세 접시에 나눠 담고, 그 옆에는 설탕을 듬뿍 퍼서 찍어 먹을 수 있게 두었지요. 그리고는 안방에서 노는 동생들에게 한 접시를 주고 나머지는 쟁반에 담아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갑니다. 아직도 그날이 생생하게 기억나요. 1층에 갔더니 마침 문구점에 납품하는 아저씨가 물건을 다 내려놓고 땀을 닦으며 엄마와 문구점 주인이었던 외숙모와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지요.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에 감자를 삶아 가지고 내려갔네요. 지금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니 그 삶은 감자는 절대적으로 맛있을 수밖에요. 어린아이가(그때 저는 150cm 정도였거든요) 감자를 삶아서 예쁜 접시에 담아 집에 있는 가장 예쁜 포크까지 챙겨 가져오는데, 가령 덜 삶긴 감자라 해도 맛있을 수밖에 없지요.
삶은 감자를 먹다가 마지막 반쪽을 남겨두고 감자를 먹을 때마다 떠올리는 이 일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사진을 찍어 보았습니다. 삶은 감자도 찍먹이죠. 30년 전의 그날, 요리하는 즐거움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기억을 가지런히 정돈하다 보니 저지레를 할 수 있도록 부엌을 내주시고 조용히 재료도 준비해 주신 엄마의 사랑을 발견했어요. 게다가 어른의 시선이 아니라 아이인 제 눈높이에서 바라보고 칭찬해 주신 스쳐간 어른들의 말씀에서도 용기를 얻었고요. 마지막으로 추억을 찾으며 얻은 깨달음을 덧붙이자면 역시 사람은 자신이 준 것을 더 잘 기억하나 봅니다. 받았을 때 느끼는 고마움의 크기보다 주었을 때 느끼는 만족과 기쁨이 조금 더 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앞으로는 받는 고마움을 더 오래 기억하는 것에도 관심을 써야겠어요.
다정한 독자님, 오늘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감자 샌드위치 사진이 없었는데, 학원에 가는 춘기에게 넣어준 간식통에서 하나를 훔쳐(?) 먹을 수 있어서 사진이 생겼습니다. 이거 먹으면서 글을 쓰는 중입니다.
편안한 토요일 저녁이 되시길 빕니다.
손흥민 선수와 김민재 선수의 축구 경기도 놓치지 마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