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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nette Apr 30. 2024

겨울비

그리고 월드 아틀라스 와인 

살갗 구석구석 달라붙은 겨울비. 나의 어떤 것.

말미가 길었다. 샤워기 아래에 한참을 서 있었다.

날카롭게 사고를 저몄다.

머리를 말리고 책상 앞에 앉았다.

스토너를 완독했다.

나는 그에게 이디스였을까?

아니, 아무도 아닌 채 수록되지 못했겠지.


이후부터는 철저히 외향인의 삶을 따랐다. 연락을 달가워하는 이들은 많았다. 친구. 선배. 동기. 어떤 부분에서는 그 사람을 대체할 수 있는 인간들. 혹자는 그보다 키가 컸고, 잘생겼고, 말을 잘했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의 책상에 월드 아틀라스 와인 책이 있었음을 기억한다. 나도 따라 읽었으니까. 백오십칠쪽의 보르도산 내추럴 와인을 가장 좋아하던 것을 기억한다. 나도 따라 마셨으니까. 그래도 와인보다는 항상 포차에서 소주병을 기울이던 취향을 기억한다. 나도 그랬으니까.

또 프레데릭 말. 몰튼브라운. 톰포드 안경...


... 우습게도 절박해진다. 내 앞의 어떤 남자는 냅킨 뭉치로 테이블의 와인 방울을 닦는다. 슈트에 디올 소바쥬를 뿌린 남자. 떼루아며 빈티지며 와인에 사족을 붙인다. 알콜 냄새에 사고가 멍청해진다. 뿌연 연기와 귓가를 울리는 소리의 구성이 감각을 둔화시킨다. 그럼에도 그 사람의. 


그의..

신호가 걸리면 내 볼을 만지던 손.

넷플릭스를 켜 주던 손.

웃음에 무너질수록 완벽해지던 얼굴. 

가끔은 읽히지 않던 눈동자.

그 가운데 들어앉아 있었을 나 자신이 일면식 없는 타인처럼 느껴져 이상했다. 


아무런 타이틀에도 갇혀 살지 않던 모습과

그것이

주어진 삶을 그저 살아가던 내게 뚫어준 숨구멍의 크기...



그 사람은 사랑이나 주지 왜 꿈도 줬을까.


항상 솔직하지만 아무에게나 투명해지지는 않았던 모습과

그것이 비로소 나의 허영과 자폐적인 고립을 되돌아보게 했던 짧은 시절.


그를 보면서 난 깨달아 갔으니까. 인정하는 법을 배웠으니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알 것 같았으니까. 그 사람과 함께라면 타인의 이야기를 읽듯 껍데기 뿐인 감성으로 누군가의 두번째에 머무르길 자처했던 나의 지난 관계를 아무런 자기연민 없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원할 때마다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랑이란 지금 이 순간을. 함께 살아가는 것. 더도 덜도 아닌 그것 뿐임을 난 원할 때마다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사람은 나의 애인보다도 선배였고, 나의 우상이었고, 삶의 지표였는데...


그런데 날 이렇게 기로에 던져두고...

그가 잔인하게 떠나갔다. 


이제 내 앞의 남자는 어떤 호텔의 접객을 오만하게 평가한다. 골프와 투자 이야기. 누군가의 승진 소식과 로스쿨 시절의 에피소드를 꺼낸다. 성과급이고 종부세고 이상한 말들을 계속 계속 한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어도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슈트에 디올 소바쥬를 뿌린 남자.


나는 그 냄새가 역겨워졌다.


문득 사무치던 고통의 비가역이 의미없는 웃음처럼 비집고 튀어나왔다.

그 순간에서 깨닫는다.

내게 원본은 그 사람 단 하나.

다른 이들은 모두 아류작일 뿐...


이별을 말하던 그 사람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처음 만난 날처럼 내 눈을 자꾸만 피했다

나 또한 그 젖어있는 눈동자를 쳐다볼 수 없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사실 가진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초라한 나. 껍데기 뿐인 나. 흉내만 낼 뿐인 나.

그런 내게 처음으로 본질적이었던 사람. 수많은 청사진 한가운데 단 하나의 원본.

세상의 빈정을 똑똑히 반박해낸 사람.

나는 그렇게 유일한 사람에게 아무것도 되어줄 수 없음을 깨닫는다.


여섯 살 이후로 울어본 적 없다면서 그 사람은 쌓여온 눈물이 지금에서야 터진 것처럼 계속 계속 턱 끝에 눈물방울이 맺혔다.


싫어할까봐..

닦아주지는 못했다.


진눈깨비가 사카린처럼 나리던 날...



- 일이 안 풀릴 때 가장 먼저 쳐낸 가지가 당신이었던 겁니다

- 상황을 타개할 만큼 당신이 좋지 않았던 겁니다

- 당신의 미래까지 사랑해버리면 그럴 수 있어요.


나는 지식인에 달린 세 번째 답변을 믿고 싶었다. 방에서는 또 그 사람의 향수 냄새가 난다.


친구들을 만났다. 상념에 자맥질하는 날 두고 그들은 다른 얘기를 한다. 제각기 자신이 만나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거나, 엊그제의 데이트 코스를 논한다. 나는 발언권이 없는 부외의 객처럼 웃기만 한다. 

돌아오는 길 비가 내렸다.


살갗 구석구석 달라붙은 겨울비.

나의 어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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