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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 소아과의사 Mar 15. 2024

정원사가 두고 간 꽃 한 송이

#1

햇빛이 길게 방을 가로질러 늘어선 느지막한 오후의, 그래서 따뜻한 방 한편에 꽃 한 송이가 놓여있다.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기지개를 켜며 실눈을 뜨고 방을 둘러보던 중, 그 꽃이 눈에 띄었다.

멀리서 보아도 참 예쁜 꽃이다. 꽃잎이 방실방실 하게 활짝 피기 전, 생명력을 머금고 있다. 얼핏 붉은빛이 도는 것 같지만 오후의 황금빛 햇빛 때문에 착시가 일어난 것이다.
그 꽃은 분명, 아주 풍성한 산호빛이리라.  이제 막 시작된 풍성한 봄을 알리듯, 부끄러운 밝은 산호색일 것이다.  아직 다가가 만져보지 않았으나, 꽃잎은 부드럽고 매끄럽다. 잎새가 자라며 만들어진 세로의 문양이 선명하여, 이 꽃이 아직 어리고, 화병에서 수일간 더 활짝 피겠구나 알 수 있었다.  꽃잎의 끝은 다 열리지 않아 곧고 마주한 잎들과 손을 마주 잡고 견고히 서있다. 겹겹이 화려한 꽃잎들은 마치 예쁜 열매처럼, 서양 그림의 겹치마처럼 층층이 속에 드리운다. 그리고 그 속에 색을 아직 알지 못한 꽃술들이 화려히 감춰있겠지.



#2

이 꽃의 이름은 무엇인가. 나는 이전에 이 꽃을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다. 산책하면서 보았던가. 아니면 인스타그램에서 스치듯 보았던가. 아니면 꽃집에서 누군가에게 선물을 하기 위해 둘러보던 꽃들 중 하나였을까.  맡아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이 꽃의 향기를 나는 알 것도 같다. 장미는 아니겠지만, 장미향이 날 것 같다.

분명 장미는 아니다. 가시가 없다.

나는 이 꽃을 좋아한다. 내가 이 꽃을 좋아했던가? 생각이 나진 않는다. 하지만 지금 내가 이 꽃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은 안다. 나는 이 꽃이 좋다. 가까이 가서 만져본다. 꽃잎이 부드럽다. 아직 열리지 않은 꽃잎들이 궁금하고, 그래서 열어 속을 보고 싶지만, 아까워 참는다. 기다리기로 한다.

다시 손 끝으로 꽃잎을 쓰다듬는다. 부드럽다. 벨벳 같기도 하고 비단 같기도 하고, 어쩐지 손 끝에서 향기가 나는 것 같다. 지금 그 향기를 맡은 것처럼 코로 숨을 크게 들이쉬어본다. 고개를 잔뜩 내밀고 코에 집중하면서 계속 킁킁거려 보기도 한다. 어딘가에 흩어져 있을 것 같은 내 곁의 작은 꽃 한 송이의 이 향기를 맡기 위해 온 정신을 쏟는다.


#3

나는 소중한 이 꽃을 물병에 담아본다. 그리고 해가 잘 드는 창가에 놓아두었다. 행여 해가 지고 찬기에 꽃이 얼까 밤에는 창가에서 먼 곳으로 옮겨놓는다. 아침에 해를 맞는 꽃잎은 더 화사하다. 해를 맞은 꽃은 어제보다 더 기운을 내어 꽃잎을 옆고, 저녁이 되면 다시 수줍게 꽃잎을 닫는다. 꽃이 성숙하여 더 화려하게 피어가는 하루가 지날수록, 안쪽의 꽃이 들이 고개를 들고, 꽃은 더 방실방실 피어난다. 공처럼 웅크렸던 그 꽃이 이제 큰 항아리처럼 넓어지려 한다.

낮에 해가드는 창가에서 봄바람에 살랑살랑 춤을 춘다.

이 꽃의 향기에 지나던 벌도 창가 방충망 밖을 맴돈다.

그이는 나의 기쁨이 된다.

꽃의 이름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나에게 이 꽃은 나만의 꽃이다.


#4

꽃이 지고 있다. 꽃이야 지는 것을 누가 모를까마는, 이 꽃은 나에게 특별했다. 흔들리던 나의 마음에 위로를 주었다. 빛이 없는 작은 방에 빛을 주러 온 것 같았다. 그동안 보았던 수많은 꽃들처럼, 이 꽃도 질 것을 알기에 애가 닳았다.

그러다가 문득, 너무 아름다워서 생각지 않았던 정원사가 생각났다. 정원사는 왜 이 꽃을 가져다 놓았을까. 이곳의 정원사는  특별했다. 그는 정원의 구석구석을 알고 항상 아꼈다. 그는 모든 꽃의 이름을 알고 피는 시기와 지는 시기, 불리하고 유리한 환경을 알고 있기에 꽃들을 돌보는데 최적화된 사람 같았다. 그는 나에게 이 꽃을 왜 가져다주었을까.

절벽을 걷는 것 같던 나의 마음에 손을 잡아주는 것 같던 이 아름다운 꽃 한 송이가. 지난 며칠간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5

꽃 한 송이가 나에게 준 위로는, 방에 가둬놓았던 나를 이제 정원으로 나갈 수 있는 용기를 주었는지 모르겠다.  이전에 산책하며, 꽃집에서, 혹은 인스타그램에서 지나치듯 보았던 수많은 꽃들도 너에게 용기를 준 바로 그 꽃 한 송이와 같은 꽃이다. 소중한 바로 그 한송이의 꽃이다. 그 꽃은 나이기도 하고, 너이기도 하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이기도 한다. 의미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 세상은 우리가 소통하는 대로 이어지는 곳. 때로 실망을 많이 하겠지만, 그래도 한번 더 희망을 가지고 믿어주면, 그 믿음 위에서 다시 일어서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고 믿어볼까.


#6

어린 왕자가 별에 두고 온 장미꽃을 그리워하다가, 사막의 정원에서 수많은 장미들을 만난 어린 왕자의 마음이 어땠을까, 어린 시절엔 그랬다. 아마 배신감이었겠지, 특별하지도 않은 장미주제에 그렇게나 요란을 떨다니.

아니, 어린 왕자는 그 많은 장미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을 거야. 그 소중한 의미들이 이렇게나 많이 있다니.. 하지만, 나의 장미는 외롭게 홀로 별에 남아있다니. 그게 사랑이고, 믿음이지.



#7

어느 날 아침, 출근을 하면서 '정원사가 두고 간 꽃 한 송이'라는 플레이 리스트를 들었다. 문득, 그 꽃은 어떤 꽃일지 상상하면서 상상 속의 그 꽃의 향도 맡고, 꽃잎도 만져보았다. 그리고 그 꽃과 함께 '현현'한 시간을 보낸 충만함이 문득, 내 삶의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았다.

꽃 한 송이는 가장 큰 의미로 나에게는 아이들이다. 하루하루 만나는 환자들은 나에게 가장 큰 기쁨이고 소중한 존재들이다. 그들이 잘 크고, 발달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내 역할이라면 그들은 활짝 피고 생명력이 넘치는 것이 역할일 테니.

하지만, 다시 그 작은 방안을 돌아보았을 때 한송이가 아닌 가득한 꽃들이 있었고, 그 꽃들 가운데 나도 있었다. 작지만 작지 않은 의미, 나는 온전히 나의 시간으로 살아가기에 이 생은 나의 감각과 생각들에 좀 더 집중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다시 알았다.


#8

한 송이 꽃이 어디서, 왜 왔는지를 묻다가 시간이 한참이나 흘렀다. 이제 그 질문보다 꽃 한 송이의 의미와 존재에 집중하려 한다. 한 송이 꽃의 시간은 길지 않기에, 집중하고 인식하는 만큼, 존재가 확장된다는 것을 이해했기에.

잠시나마 이 지구에서의 짧은 시간을 만끽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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