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에서 비엔나 가는 버스 안. 비가 온다. 여행의 좋은 점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몇 개나 적을 수 있을까.
1. 몸은 피곤하지만 정신이 맑아진다. 걷고, 먹고, 이동하고, 자고의 연속. 평소 안 움직이고, 안 먹고, 소비하지 않는 내 일상과 반대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아주 건강해진다. 평소 운동을 왜 해야 하는지 제대로 깨달아간다. 인간은 움직여야 한다.(하지만 한국에 돌아온 나는 보상심리로 한 달간 침대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2.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환경을 이기지 못한다. 내 성격, 가치관, 선택은 모두 한국에서 내가 자란 환경에 의해 형성됐을 것이다. 그래서 항상 궁금했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태어났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까? 아마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겠지. 이런 상상을 현실에서 조금이나마 실현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여행이다. 평소 나는 새로운 인간관계를 거부하다시피 살았다. 사람한테서 만은 지나치게 안정감만을 추구해서 말과 행동이 예측 불가능한 사람을 만나는 게 스트레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인간관계는 좁디좁았다. 고향에서 중고등 학교를 모두 같이 나온 오래된 고향친구 몇 명과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며 만난 동기 몇 명. 직장생활도 해보지 않았고 사람이 4명 이상 모이는 자리엔 기가 빨려 절대 가지 않는 탓에 잘 알지 못하는 다수의 사람을 상대해 본 경험이 없다. 그러나 여행하면서 느낀 나는 처음 보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그리 어색해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내 일상 속에서 만난 사람보다 더 편하기도 했다. 내가 인간을 싫어한 게 아니라 다행이다:)
3. 나에 대한 객관화, 한국에 대한 객관화가 가능해진다. 사람은 특정 집단 안에 있을 때는 절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른다. 그 밖에 나와서 한 발치 떨어져 내가 있던 곳을 봐야 깨닫는다. 내가 받은 교육 그리고 그 교육에 의해 형성된 가치관은 절대 지구촌 평균이 아니다. 오히려 이상해 보이기까지 한다. 예를 들어 외국인이 볼 때 비상식적인 교육시스템과 과도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북한만큼이나 이상한 세뇌를 받은 사람들 같을지도 모른다.
4. 나에게 이미 주어진 선택지 말고 또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내게 주어진 1~5번 선택지가 모두 마음에 안 든다면 6번을 만들어보자. 내가 살던 곳과 완전히 다른 세계를 경험할수록 6번 선택지를 만드는 게 쉬워진다.
5. 작은 것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작은 곁가지들을 신경 쓰지 않게 되니 큰 줄기, 본질에 가까워지는 기분이다. 몇 달을 생존하는데 필요한 건 많지 않다. 잘 곳, 옷 몇 벌, 세면도구, 식량 이 정도. 모두가 이 정도는 다 갖고 있지 않은가. 나는 이것만으로도 아주 행복하게 여행한 것 같다. 일상도 미니멀하게 살고 싶다. 줄일 수 있을 때까지 줄여 간소하게 살고 싶다.
물질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불필요한 잡생각이 사라지고, 사소한 것들을 신경 쓰지 않게 된다. 내 마음에 안 드는 신체부위, 거슬렸던 습관, 후회되는 과거 이런 것들은 여행 중에는 머릿속에서 다 사라진다. 생존에만 집중하면 되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으로 이거 아니면 안 돼라는 마인드를 놓고 의연해질 수 있다. 내가 속한 곳, 내 일상에 파묻혀 그 안에서의 일들에 괴로워하지 않게 된다. 넓은 세상에서 일상 속 내 걱정은 먼지 같은 고민 같이 느껴진다.
6. 다양한 사람들을 보면서 어떻게 살든 괜찮다는 느낌이 든다. 인간 삶의 형태는 정말 다양하다. 내가 살았던 작은 세상에서 만들어진 상식은 다른 세상에선 상식이 아니다. 특히나 아프리카 대륙의 모로코 사하라사막에서 사는 사람들과 북극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인 노르웨이 트롬쇠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보면서 이런 극한의 기후 조건에서도 인간이 어떻게든 적응해 살아갈 수 있구나 경이로움을 느꼈다. 외모도 다르고 종교도 다르지만 자연을 이용하면서도 크게 훼손하지 않으려는 그들만의 규칙이 존재한다는 점은 같았다. 여행 중 가장 흥미롭게 다가온 지점이었다. 사하라 사막에서 투어를 진행하는 베르베르인과, 트롬쇠에서 오로라 헌팅투어를 진행하는 다니엘에게 자연이란 어떤 의미일까. 이들은 자신들의 직업을 자연에 순응한 어쩔 수 없는 결과라 생각할까, 아니면 자연이 주는 선물이나 소명이라 생각했을까.(내가 만들어낸 무언가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 또는 선조들이 만든 유산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에 대해 다른 글에서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려 한다. 인간 곧 자원인, 노동력을 갈아서 돌아가는 나라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 이 지점에서 완전히 사람들이 살아가는 태도가 달라지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현지인뿐만 아니라 몇 년 동안 정착하지 않고 하루살이로 살아가는 히피족도 만나고, 외국에서 학교나 직장을 다니며 멋진 커리어를 쌓아가는 한국인도 만나고, 퇴사하고 여행에 전재산을 다 쓸 거라는 사람도 만나고, 디지털 노마드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만난다. 뭐 어떻게든 다들 잘 살아간다. 생존에 필요한 돈만 벌어진다면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선에서 그때 그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후회 없이 사는 방법 같다. 내 성별, 이름, 국적, 외모, 태어난 곳 모두 내가 선택한 게 아닌데, 내 직업 그리고 살아가는 방식 정도는 내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일지도...? 인생에서 하게 되는 모든 결정의 가치는 성공과 실패라는 결과가 아니라 '내가 선택했다는 사실'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유의지를 가진 한 인간으로서 내 삶에 정당한 권리를 행사했다는 게 의미 있는 것이다. 그게 인생이니까. 하나씩 경험해 보면서 망해도 보고 성공도 해보고 희로애락을 느끼는 과정이 곧 삶이니까. 인생이 내 선택들로 채워지고 있다는 건 자부심 가질만한 일이다.
7. 새로운 도전에 대한 용기가 생긴다. '혼자 계획 없이 여행도 갔다 왔는데 내가 뭘 못하겠어!'
2023.12.21
종합해 보면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은 인간을 덜 편협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인간은 애초에 자기중심적이다. 자기 주변 10명 이내 사람들의 평균이 세계 평균이라 믿고, 자신이 살고 있는 아주 작은 사회의 룰이 모든 사회에 적용된다 믿는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직접 부딪혀 깨달을 때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사물과 현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동안 내가 가졌던 가치관이 당연한 게 아니라 단지 여러 가치관 중 하나일 뿐이라는 걸 깨닫게 되면 타인의 가치관에 대해 가치판단을 멈추고 모두를 있는 그대로 포용할 수 있게 된다. 현대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 아닌가.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 포용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