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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eo Jan 22. 2022

한 회사에서 9년간 일하다

맙소사, 다음 달이면 9년차라니

2022년 새해가 밝았다. 크게 특별한 느낌도 없었고 몇일을 앓느라 정신없이 새해를 맞이했다. 

크리스마스도, 새해도 그냥 지나갔을 뿐이었다.


매년 1월이 가장 빨리 지나간다더니. 연말과 연초부터 나를 긴장하게 만든 두 건의 촬영이 끝나고 한숨 돌리며 달력을 보니 벌써 1월 중순이다. 다음 달이 2월, 곧 8년 만근을 꽉 채운 9년 차로 접어든다는 소리다. 갑자기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나이를 한살 더 먹은 것보다, 내가 8년을 꽉 채웠다는게 더 놀라운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29살이 되던 해가 더 심란했고 그 덕인지 30살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 때의 내가 느꼈던 감정과 비슷한걸까. 9년차로 접어들었다는 것은, 10년차가 1년 밖에 안남은거니까. 


휴학을 결심하고 일을 시작하다


나는 재수와 함께 미대입시를 시작했다. 그러니 남들보다 훨씬 불리한 조건이었다. 같이 입시를 준비하던 고3 동생들은 이르면 중학교때부터, 아무리 늦어도 고 2때부터는 그림을 시작했으니 말이다. 늦게 시작한 나는 동생들보다 그림도 느렸고 부족했다.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존심 상하게 엉덩이까지 맞아가며 입시 미술을 배웠고 정작 학교는 비실기로 들어갔다. 하지만 입시 미술을 한 것에 대해 후회는 하지 않았다. 던져진 주제에 맞춰 4시간 안에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그림으로 완성시키는 과정을 훈련한 덕을 봤기 때문이다. 입학하자마자 예대답게 매 수업마다 과제가 있었는데, 자신의 아이디어를 구체화해서 결과물로 만들어 가는 식이었다. 한국에서 3년간 입시 공부만 한 친구들은 이런식의 과제를 처음 맞이하고는 적잖은 당황을 했다. 한번도 해본적이 없는 과제였으니 말이다. 어떻게 시작을 해야하는지, 무엇을 먼저 해야하는지 어려울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게는 매번 하던 입시 미술을 완성해 가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 던져진 주제에 맞게 과제를 해가는 게 즐거웠다.


나름대로 즐거웠던 2년간의 대학생활을 마칠즈음, 미래에 대한 고민이 엄습해왔다. 패션 에디터에 대한 꿈이 있었고, 에디터가 되지 않더라도 패션계에서 일하고 싶었던 나는 휴학을하고 스펙을 쌓기로 결심했다. 마침 부모님도 서포트 하는게 조금 부담이 되니 일년만 휴학하는게 어떠냐는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여러곳에 이력서를 넣었고 면접을 보면서 현실에 대한 자각을 더욱 하게됐다. 내가 생각하고 상상하며 짐작만 해본 일과 실제 하게 될 일은 조금 다를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휴학생이고 다시 학교를 돌아갈수도 있는 상황임에도 나를 뽑아준 회사에서 첫 에디터 생활을 하게됐다. 바로 지금 회사다. 그 때는 대표님을 포함해 15명 정도인 회사였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지금, 회사의 슬랙 채널에 있는 전체 인원수는 960명이다. 


한 회사를 오래 다닐 수 있었던 이유


2011년 6월 6일. 첫 입사날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9시에 맞춰 출근을 했으나 내 자리에 의자가 없었다. 의자만 없는게 아니라 내 사수도 없었다. 23살의 나는 지금과는 다르게 모든게 서툰 대학생 신분이었을 뿐, 사회 생활이라곤 1도 모르는 말 그대로 초짜였다. 그러니 사무실에 앉아있는 선배들에게 말 붙이는 것조차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에 숨이 막혔다. 신입사원이 왔지만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고 의자가 없어 쩔쩔매는 나를 본체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면접에서 만난 내 사수는 왜 나타나질 않는거지. 날 버리고 말없이 잠수를 탄건 아닐까..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내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알고보니 나의 사수는 회사의 '지각왕'이었다. 내가 출근하고 1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타났고 거의 90도가 되도록 전 직원들에게 폴더 인사를 하며 "죄송합니다"를 연발했다. 그리고 난 첫 출근날 11시까지 야근을 했다. 첫날부터 빡샜던 회사를 7개월간 다니고 나는 다시 졸업을 위해 학교로 돌아갔다. 그리고 2014년 2월 24일 다시 재입사를 했다. 첫 퇴사 당시 대표님이 회식을 마치고 내 머리를 만지며 "졸업하고 다시 와~ 알겠지?" 라는 말에 알겠다고 대답은 했으나 속으로는 영원히 안녕을 외쳤는데 말이다. 


그런데 다시 돌아온 회사는 매년 성장을 거듭했다. 죽도록 퇴사하고 싶었던 시기도 있었고 자기전에 울면서 내일은 제발 무사히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던 날도 많았다. 근 2년간은 야근을 안한 날을 손에 꼽을 정도로 정시 퇴근의 기억이 없다. 권태기도 왔었고 스카웃 제의도 왔었지만 권태기는 극복했고 스카웃 제의를 한 회사는 오히려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경쟁사는 망하고 우리 회사는 패션 플랫폼 중에서는 매출로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독보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그리고 투자를 받고 회사는 더 커지고 신규 사업을 확장하고... 그만두려고 할 때마다 새로운 콘텐츠를 제작할 기회가 생겼다. 최근 2년간 버틸 수 있었던 건 나를 알아봐주는 새로운 상사 덕분이었다. 


주변에서 받는 단골 질문 


30대의 나이에 한 회사를 이렇게 오래 다닌 사람은 내 주변에도 딱 한명 뿐이다. 그러니 내 지인들도 내가 신기할 수 밖에. 지인들 뿐만 아니라 새로 회사에 입사한 분들에게도 정말 많이 받는 질문이다. 


"어떻게 한 회사를 그렇게 오래 다닐 수 있어요?" 


이 질문에 그때 그때 했던 대답은 회사가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계속 잘되서, 혹은 내가 매번 제작하는 콘텐츠의 브랜드가 달라지니 매번 새로운 일을 하는 것 같아서 등등. 그런데 내가 오랫동안 회사에서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주변 친구들처럼 쉽게 그만두지 못했던 이유가 오늘 돌연 떠올랐다. 그건 바로 아빠 때문이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때문인지 덕분인건지. 내가 스물두살 즈음 까지도 아빠는 한 회사를 꾸준하게 다니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무렵의 기억에는 아빠가 한달에 한번꼴로 회사를 그만둔 기억이 난다. 그 지경이었으니 당연히 온 가족이 가난에 시달릴 수 밖에. 집을 다 뒤져도 백원, 십원짜리 뿐이던 시기를 보내며 우리 아빠는 왜 그럴까를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고 아빠의 입장에서 이해해보려 노력한게 기억난다. 가장으로서 제대로 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것이나 다름 없지만 아빠를 미워하거나 증오하진 않았다. 


내가 아는 아빠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걸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빠를 참 좋아했고 사랑했다. 사랑하니까 이해하고 싶었다. 아침이면 자고 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너무 소중한 탓에 얼굴을 조심스레 만지며 머리카락을 쓰다듬곤 했다. 가족이 우선순위에 있었지만 자신도 어찌하지 못하는 자신의 문제에 직면할 때면 싸울 힘이없어 도망가는 회피형 인간이었다. 직장에서는 싫은 소리를 들으면 견디질 못해 도망가기 일쑤였다. 


그 시기에 아빠로 인해 가족이 감당해야할 짐은 너무나 무거웠다. 돈이 없어서 버스는 어떻게 탔는지 기억도 안난다. 피아노 학원을 다닐때였는데 학원비는 계속해서 밀렸고 엄마는 매일 울면서 말라갔다. 그 때 몸소 경험한 인생의 교훈이 내 근간에 자리잡게 된것 같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 어려운 문제라고해서 회피할 때 그 결과가 어떤지를 말이다. 그러니 큰 결정 앞에 설 때마다 내가 있는 자리를 쉽게 떠날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인생에서 굵직한 선택들은 결국 내 삶의 경험과 경험을 통해 얻은 가치관으로 결정되는 것 같다. 


8년차를 넘어가는 지금 이 시점에서 인생의 다음 스텝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내 삶의 방향성과 본질로 더 깊이 들어간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까? 분명한건 내가 지나온 모든 여정들 중 이유없는 경험은 없다는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스티브 잡스의 말이 있다. 


"The journey is the reward."


몇년 뒤 나의 모습이 궁금해진다. 나는 어떤 여정을 걸어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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