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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각보자기 Mar 17. 2022

언제까지고, 언제까지나

아빠 생신과 설 명절을 겸해서 혼자 해남에 다녀왔다. 이른 아침에 출발해도 해남에 도착하면 해가 중천이다. 서둘러 버스에서 내리는데 누가 내 앞에 짠-하고 나타났다. 엄마다. 읍내 병원에 갔다가 나를 마중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서둘렀던 건 엄마도 마찬가진가 보다. 

예상치 못한 등장에 엄마를 알아보는 시간이 좀 걸렸다. 첫 인상은, ‘웬 할머니야’ 싶었다. 작년 여름 이후로 그새 세월이 첩첩 쌓였다. 염색하지 않은 엄마의 허연 머리가 낯설었다. 키는 더욱 작아져 엄마는 이제 정말, 완벽하게, 할머니가 되었다.  

 

해남에 간 김에 늦었지만 엄마에 대한 글을 건넸다. “엄마, 그때 엄마한테 글 써도 되는지 물어봤잖아. 그거 다 썼거든? 사람들도 다 좋대. 엄마도 읽어 보라고.” 

엄마가 읽기 쉽게 글씨 크기를 키워 제본하느라 책값보다도 비싼 인쇄비가 들었지만, 설마 엄마가 이걸 볼까 싶었다. 살면서 한 번도 엄마가 책 읽는 모습을 본 적 없다. 가만히 앉아 쉬지도 않는 엄마가, 가만히 앉아서 책까지 읽는 모습은 도저히 상상 불가다.

엄마에 대한 글 모음집은 내 상처를 치유하게 해 준 기특한 결실이면서, 동시에 엄마와 나 사이에 있는 무량한 간극의 결과기도 했다. 차마 엄마에게 말하지 못해서 글을 썼으니까. 말했다고 해도 반도 이해받지 못했을 테니까. 옛날 사람인데다 책도 안 읽는 엄마는 내가 하는 말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엄마는 어떻게 그렇게 단언해?’라고 했을 때, ‘아야, 그 말이 뭐시다냐?’ 되묻는 엄마. 자못 심각한 상황이었던 나는 맥이 탁 풀리고, 그렇게 내가 엄마와 나눌 수 있는 감정은 우리가 함께 아는 어휘 내로 한정됐다. 

그러니까 설령 엄마가 이걸 읽는다 해도 이 문맥상 의미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기에, ‘엄마는 왜 나를 낳았어?’ 같은 말을 써 놓고도 태연히 글을 건넬 용기가 났는지도 모른다. 

 

‘오메, 오메’하며 엄마가 달뜬 얼굴이 됐다. 내가 영양제나 화장품을 사다 줬을 때는 예의 그 ‘쓰잘데기 없는 짓’으로 평가하더니, 이번엔 다르다. 정말 기쁜가 보다. 왜 기쁠까, 엄마가 주인공인 글이라? 딸내미의 정성이 들어 있어서? 하긴, 엄마는 전부터 편지 받는 것을 좋아했다. 내 마음이 담긴 긴 편지라고 생각했을까?

엄마는 단숨에 첫 장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음의 높낮이 없이 읽어 내려가는 글 읽기. “엄마있잖아나-엄마에-관해글써도-돼-뭔글을그냥-이런저런엄마-이야기-” 엄마의 이런 적극적인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다. 오히려 내 얼굴이 뻘게지는 느낌이 들었다. 

“엄마, 나 올라가고 나중에 천천히 봐...”

 

서울에 도착했다고 전화를 거니 그새 4~5편까지 읽었는지 두서없는 이야기를 쏟아 냈다.

"아야, 나락 스물세 석 주고 산 거 아니고 스물다섯 석이랑께. 엄마가 스물세 석이라고 하든?"

"엄마가 그때 너 다쳤을 때, 그때 엄마가 진짜 제 정신이 아니었나 보다."

“연진아, 엄마가 미안하다. 이제는 안 그럴게. 다 엄마라 그래. 엄마는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해 주고, 이제 잊어부러라잉...” 

엄마, 나도 그 글을 쓸 때 이미 다 잊었어. 글에 썼듯, 엄마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내 엄마였다고 해도 나는 사랑받고, 상처받았을 거야. 

 


-

해남에 다녀온 지 열흘도 넘은 오늘 아침, 엄마는 또 글을 읽었는지 그에 대해 이야기한다. 

“몇 번을 읽고 또 읽었는디야. 엄마니까 그래. 어쩔 땐 자식이 밉고, 돌아서면 마음 아프고... 엄마니까 그랬다. 이해해주라...” 

"이 앞의 논 살 때 나락 스물세 석 아닌디, 너가 잘못 썼더라. "

“아야, 새우깡 허쳐주면 뽈깡 잡고 인나서 할머니랑 아빠, 엄마 있는지 보고 그랬제잉. 나는 정말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한디야.”

"허리 아플 때 얘기도 있어서 내가 또 생각했다. 인자 일을 적당히 해야지..."

“내가 이거를 평생 간직할 것이다. 너한테 답장으로 편지라도 쓰고 싶은데 나이가 등께 쉽지 않고. 근데 정말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아. 이렇게 전화하니까 다행이다.”

 

엄마는 다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글에 나오는 '자존감', '유대 관계', ‘미니멀리즘’이나 ‘무라카미 하루키’ 등에 대해 엄마가 알 리 없다. 단어를 선택하고, 행간을 조절하며 쓴 언어의 맥락을 애석하게도 엄마는 모를 것이다. 

그럼에도 엄마는 헤아리고자 한다. 내 마음, 딸의 마음, 작가의 마음을. 엄마는 상기된 얼굴로 이 선물 같은 글에 대해 몇 번이고, 몇 날이고, 언제까지고 이야기할 것이다. 나는 언제까지나 그 이야기를 듣고 싶다. 

 

2022.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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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좋은 선물을 주었다는 기쁨에 겨워 이 글을 썼다. 글 속의 '오늘 아침'엔, 글 모음집이 작가적 성공에는 못 미쳤어도 엄마와 나 사이에서 어떤 의미를 거뒀고, 그래서 충분하다 싶었다. 

글을 발행하는 오늘에서야 다시 생각하니, 어쩌면 나는 엄마에게 숙제를 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언제까지고 자신의 후회와 반성과 용서에 대해 이야기하는 엄마를 기다린 것인지도. 


2022.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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