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팅 그만해 즈에발
이 시리즈를 기획한 계기는 다분히 충동적인 감정 때문이었다.
나도 그놈의 MZ긴 하지만 '요즘것들'을 다 이해하긴 너무 어려운,
그렇게 어느덧 15년차 직장인으로 비실비실 살고 있는 와중에
'마케팅'이라는 이 직무에 대한 환멸은 계속해서 커지고만 있었다.
- SNS를 많이 할수록 불안장애 발생률이 높아질 수 있다는 연구에 격한 공감을 하고,
- 딥페이크 걱정스러운데 이렇게 얼굴이며 사생활을 노출해도 되는건가 우려스럽고,
- 포털 사이트에는 낚시글이 너무 많아 정작 내가 필요한 정보를 찾기가 너무 어려워진 시대.
그러던 중 최근에 경험한 세 가지 에피소드가
마케팅 매니저라는 명함을 내밀며 살고 있는 나의 밥벌이 자아에게 진지하게 말을 건넸다.
그 세 가지 에피소드는 이렇다.
1) 핵심 정보가 실종된 헤드라인
내가 대학에서 언론에 대해 배우고, 보도자료를 쓰던 사회초년생일 때만 해도 (이것이 바로 '라떼는')
신문 기사의 헤드라인을 쓸 때 '육하원칙'을 지키는 것이 너무 중요했다.
그런데 요즘 기사에서는 '큰 병으로 가망 없어' 정도가 기사 헤드라인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 헤드라인을 보고 '아니, 누가?'를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궁금증 때문에 기사를 클릭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 역시 CTR에 기여하는 전략인가.
2) 듣도 보도 않고 쓰는 리뷰
다들 투잡 쓰리잡 하면서 월급 외의 파이프라인을 구축해야 하는 시대니까
'원고료 1,500원'이라도 벌 수 있다면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참여한 부업 오픈채팅방에서
제품을 실제 사지 않아도 쇼핑몰에 구매후기를 남길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관리자는 쇼핑몰 링크를 던져 주고, 어떻게 '제품 미제공'으로 후기를 쓸 수 있는지 안내했다.
이런 식의 '빈박스 마케팅'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성업이라고 하니
마케터라면서 이런 최신식 기법을 몰랐네. 반성해야 하는가?
3) 순진하게 믿었던 내돈내산
나는 내 오래된 네이버 블로그를 활용해 체험단이나 기자단을 하고 있는데
최근 한 원고에 공정위 문구를 떼고 '내돈내산' 워딩을 써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나는 대가성 글이므로 공정위 문구가 필수 아니더냐, 내돈내산은 쓸 수 없다 했는데
놀랍게도 직접적인 사이트 링크 삽입이 없다면 후기성 글로 간주되므로 괜찮다고 했다.
이를 간파한 나무위키의 #내돈내산 정리글을 보자.
그렇구나, 아직 내돈내산의 무게감을 믿고 있던 나, 좀 순진했다. 하핫.
새로운 마케팅의 기법(?)들을 알게 되서 차라리 기뻤으면 좋았을 걸.
이 일들이 계기가 되어 오늘날 마케터로 살아가는 나를 성찰하게 했달까,
아니 필연적으로 나는 더 이상 마케팅을 할 수 없다는 걸 확신하게 했달까.
지난 십 여년 간 마케팅이라는 범주의 이런 저런 일들을 하며 가져 왔던 내적 불편함.
나는 늘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엄밀히 말하면 마케터라는 직업도 세상의 필요에 의해 생겼고,
이론도 있고, 학자도 있고, 전문가도 있는 일이지만
아, 나는 아닌 것 같아. 그만하자, 은퇴하자.
그게 나의 가치관 때문이든, 이 시대에 대한 유감 때문이든
뭐가 됐든 마케팅 그만해 즈에발!!!
그래서 나는 마지막으로 내가 알고 있는 마케팅 지식을 어딘가에 토해내고 사라질 요량으로
오랫동안 눈팅했던 대형 커뮤니티에 '마케팅 관련 궁금한 사람 궁물 받음' 글을 쓰게 되는데...
글쎄, 그 글에 댓글이 40개쯤 달린 것이다. (아직도 질문이 들어오고 있다.)
그래서 결심했다.
쓰기로, 알려주기로, 나누기로.
환멸로 얼룩진 마케팅이지만 사실 이 일을 하며 밥 벌어 온 지난 십 년이 때론 즐겁지 않았는가?
마케팅이 어떤 직업 윤리를 가져야 한다는 걸 누구보다 고민하지 않았는가?
은퇴를 하기엔 아직 못다한 아쉬움, 펼쳐 보고 싶은 꿈이 있지 않은가?
물경력을 쌓으면서도 어느새 축적된 잡기들이 혹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놀랍게도 글감을 고민하고 쓰는 순간 순간,
내가 이 일을 애증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망할놈의 마케팅, 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