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아이가 학교에서 친구들과 게임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아이 말에 따르면 제일 처음 나서서 제안하고 팀을 모았다는 이유로 자기는 프로젝트 코디네이터를 하게 됐단다. 아이들이 정의한 코디네이터의 역할을 대충 들어보니 현업에서는 프로젝트 매니저라고 불리는 그런 역할이었다. 그런데 첫째가 코디네이터로서 프로젝트를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해서 우리 회사 프로젝트 매니저인 Nisha를 소개해줬고 2주 전 어느날 저녁, 30분가량 프로젝트 매니저의 역할과 신경 써야 할 일들, 예상되는 어려움과 해결 방법 등 속성 트레이닝을 받았다.
사실 이 30분으로 아이가 뭔가 대단한 지식을 얻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솔직히 프로젝트 관리 방법이라면 내가 직접 알려줘도 되는 일이었다. 나도 여러 해 상품기획을 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에게 현업 프로젝트 매니저를 소개해준 이유는, 자신이 뭔가 시작할 때 그 분야의 전문가에게, 아빠나 학교 선생님같이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생면 부지의 전문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별 일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었다. 살면서 처음 겪어보는 어려움을 마주했을 때 주위에 지혜와 조언을 구하는 습관은 시작점에서 정말 큰 힘이 되니까. 본인이 아무리 똑똑하고 공부를 많이 했더라도 처음 해보는 일이라면 혼자서 씨름하기보다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기 위한 도움을 요청하는 건 정말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본다면 아빠에게 자기가 뭘 모르겠는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터놓고 이야기했다는 부분에서 이 아이는 그 나이 때 나보다 훨씬 나은 성정을 가졌다. 난 그저 다 안다고, 다 할 수 있다고 잘난 척하기 바빴는데.
살면서 처음 겪어보는 어려움을 마주했을 때 주위에 지혜와 조언을 구하는 습관은 시작점에서 정말 큰 힘이 되니까
어쨌든 Nisha 와의 미팅은 잘 진행이 되었던 것 같다. 기념사진 한 장 찍은 뒤 나는 자리를 피했기에 둘이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나눴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이가 웃으면서 나온 걸 보면 뭐... 좋았던 듯.
Nisha와의 미팅으로부터 2주가 지난 오늘.
첫째가 친구들과 팀을 만들어서 함께 개발하고 있는 게임의 스크린샷을 사진 찍을 기회가 있었는데 언뜻 보기에도 제법 진척을 보이고 있다.
우여곡절은 많았다. 코딩이 어려워서 자신은 못하겠다고 포기한 팀원 대신 첫째가 코딩도 일부 대신하고 있고 작업 속도가 느려서 전체 프로젝트 속도를 늦추고 있는 친구를 격려하기도 하면서 정신이 없다. 요즘 이것 때문에 새벽까지 잠을 안 자고 있어서 컨디션이 말이 아닌데... 그냥 두는 중. 프로젝트 매니저로써의 책임감도 훌륭하고 무엇보다 이런 것도 다 경험일 테니. 솔직히 얼마나 재미있을까?
어쨌든 단순 슈팅게임은 아니고 전략시뮬레이션에 RPG적인 요소를 더했다. 모바일 게임에서 흔히 보이는 자동사냥 같은 기능도 있고. 자동사냥을 빼면 마치 X-COM의 슈팅게임버전 같은..? 그런 느낌도 들고. 프로젝트가 끝나면 한번 해 봐야지.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시키는 것만, 그것도 툴툴대며, 할 줄 알았던 나와 달리 이 아이의 중2병은 정말 바람직한 형태로 찾아왔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열정과 자존심의 형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