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저녁, 회사의 CEO와 나를 포함한 다른 한 명의 VP까지 셋이서 저녁을 먹었다. 명목상의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중요한 안건은 아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와인잔 사이로 회사와 관련된 여러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그중 하나는 내가 맡고 있는 팀의 매니저중 한 명을 lay off 시키는 것. 이제는 익숙해질 법한데도 아직까지 누군가에 대한 lay off 이야기가 나오면 자세를 고쳐 앉게 된다. 단순히 업무 이야기가 아니라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되기 때문에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아서 이야기해야 한다는 막연한 긴장감 같은 것이리라.
Lay off 이야기가 나온 이유는 간단했는데, 내 팀에 속한 매니저 한 명이 1월과 2월 퍼포먼스가 좋지 않았다. 적당히 안 좋은 게 아니라 전사적으로 이슈가 될 만큼 안 좋았다. 눈에 띄고 중요한 일을 하는 보직의 매니저들의 숙명인데, 잘하면 하늘 끝까지 평판이 솟아오르고 미끄러지면 최소한 연옥까지는 떨어진다. CEO는 내게 그를 내보내거나 최소한 step down 시켜서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자는 의견을 냈다. 처음 듣는 말은 아니었다. 지난 2월 중순부터 거의 매주 들어왔던 이야기였으니까. 그리고 내 대답은 이번에도 같았다. 좀 더 지켜보자.
이야기의 주인공은 작년 9월에 현재 포지션으로 승진을 했다. 잘해서 승진한건 아니고 그의 상사가 갑작스럽게 퇴직을 하면서 달리 대안이 없었기에 그를 승진시켰었다. 나도 HR도 조심스러웠기에 우선 3달의 평가 기간을 가졌고 그 기간 그는 맡은 프로젝트를 훌륭하게 완료해서 연봉 인상과 함께 자리를 잡았다. 문제는 이번 1월과 2월에 그간의 실적이 무색할 정도로 이슈들이 연달아 터졌는데, 유독 안 좋았던 것은 그에게 충분한 리더십이 있는가 하는 질문이 나올 정도로 팀 운영에 여러 문제점을 드러냈는 점이었다. 여기에서 관점이 달라지는데, 나는 그에게 senior manager로써 문제를 인식하고 고칠 시간을 더 줘야 한다는 입장이고 CEO는 그의 경험상 이런 문제를 드러내는 사람들은 빨리 교체하지 않으면 나중에 더 큰 문제가 터질 확률이 높다는 입장이었다.
한국 회사 같으면 CEO의 지시를 거부한다는 게 상상하기 어렵지만 미국 회사에서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결국 내가 책임지는 거니까. 그도, 나도 말하지 않은 하나는 해당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운영 전반적으로 이슈가 된다면 그땐 그가 아닌 내가 책임지게 될 거라는 것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도 안다. 아니, 눈빛이 없어도 미국에서 5년 직장생활을 하면 그 정도 눈치는 생긴다.
한국에서 일했던 시기의 나라면 그런 압박감을 감당하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미국에 와서 5년 차, 그중 1년 반은 VP로 일하면서 기른 맷집은 그걸 가능하게 한다. 내가 옳다고 믿는 걸 밀고 나갈 뚝심이 없으면, 그러니까 그냥 보스의 지시대로 단순히 따르기만 하면 대부분 그 자리에서 해를 넘기기 어렵다.
얼마 전, 다른 팀의 director 한 명이 내 사무실로 오더니 오늘이 이 회사에서의 마지막 날이라며 굳은 얼굴로 악수를 청했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시점에 그가 속한 팀의 VP 그리고 HR 디렉터가 자신을 불러서 통보를 했다고. 어쩌면 그는 큰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 같다. 중국인이었던 그는 아시아계 치고도 유난히 상명하복에 철저했는데 회사에서 시키는 온갖 일들을 단 한 번의 거부 없이 충실하게 이행했으니까. 시키는 대로 다 했더니 이제 와서 토사구팽 한다는 느낌 아니었을까.
사실 그에게 통보가 갈 것이라는 사실은 한 달 전부터.. 아니, 구체적인 날짜가 오늘이라는 걸 안 건 한 달 전이지만 그가 lay off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안 건 수개월 전이다. 예상하지 못했다는 반응을 보여준 건 그의 자존심을 지켜주고자 한 내 마지막 배려였을 뿐 몇 달 전 CEO가 그를 내 팀에 데리고 갈 생각이 있는지 물어봤을 때 그게 어쩌면 그에게 내밀어질 마지막 구명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 역시 그에게 줄만한 업무가 없다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었다. 이후 시작된 그의 lay off에 대한 회의에 나 역시 앉아 있었다.
그가 working level 개발자였다면 달랐으리라. 승진을 거부하고 자신의 전문성을 더 갈고닦았다면 할 일은 많으니까. 하지만 그는 승진..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직급 욕심이 있었다. 체면을 중요하게 여겼던 그는 승진을 마다하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높은 타이틀을 가질 수 있는 일이라면 너무나 좋아하며 받아들였다. 회사가 쉼 없이 성장하던 지난 10년.. 당연히 타이틀과 함께 연봉 역시 함께 올라갔지만 팬데믹과 함께 느려진 회사의 성장과 비용 절감은 회사에서 '이 사람이 연봉만큼의 가치를 가져오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들었고 이때 그의 높은 타이틀과 많은 연봉은 독이 됐다. 전문성이 그를 지켜줄 최후의 보루였으나 회사가 시키는 대로 이일 저일 하며 10년 가까이 지냈던 그에게 더 이상 자신만의 전문성은 남아 있지 않았다. 남아 있는 거라면, 뭘 할지 일일이 알려줘야만 하는 캐릭터라는 꼬리표뿐. 그는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한국이 기업의 크기에 따라 문화가 다르듯 미국 역시 회사의 규모에 따라, 산업에 따라, 그리고 지역에 따라 사람을 채용하거나 내보내는 문화가 정말 다르다. 내가 있는, 뉴욕을 중심으로 한 북동부와 실리콘벨리가 있는 서부의 문화는 하늘과 땅 차이고.
미국의 고용 관계가 at will 인건 어느 주나 같다. 쉽게 말해 고용주든 피고용주든 이유 불문 한쪽이 원하면 계약 해지가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 역시 경우에 따라 다르고, 주에 따라(다른 말로 노동고용법) 다르기에 하루아침에 사람을 내보내는 건 비현실적이다. 물론 당사자에게는 갑작스러운 통보겠지만 무대 뒷면에서 매니저들과 HR 사이에서는 굉장히 복잡하고 지루한 토론이 오고 간다. 짧으면 몇 달, 길면 1년 가까이 이어지기도 하는데 기업들 중에선 PIP(Performance Improvement Plan) 자체가 1년 정도 되는 곳도 있어서 저성과자를 내보내려 해도 1년 이상 시간이 걸리는 곳도 있다. 하지만 PIP 자체가 유명무실한 곳도 있으니 정말 case by case.
하지만 한가지 공통적으로 가로지르는 사실은 영화에 종종 나오는, 잘 나가던 능력자를 갑자기 "넌 해고야!"라고 하고 바로 내보내는 건 극적인 맛은 있으나 현실에서는 보기 어렵다는 부분이다. 실제로는 무대 뒤에서 정말 많은 토론이 진행된다. 사람을 내보내고 새로 뽑는건 아무리 노동 시장이 유연한 미국이라 하더라도 많은 노력과 시간, 돈이 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회사에 입사한 이후 내가 경험한 대규모 lay off는 두 번인데 그중 한 번은 내가 책임자가 되어 진행했다. 한 지역의 branch office 전체를 날리는 결정이었는데 솔직히 이런 경우는 오히려 깔끔하다고 할 수 있다. 개개인의 업무 역량이나 직무에 관계없이 비즈니스 환경 변화에 따라 내려진 결정이니 통보하는 입장에서 그나마 부채감이 덜 하고 법적으로도 간단하다. 대상자들을 추려내고, 각자의 채용 조건을 검토해서 필요하면 별도의 패키지를 준비한 뒤, 당신 개인의 문제는 없으나 회사의 사정으로 인해 어쩌고 하는 글을 작성하고 어느 날 한 번에 통보를 하면 끝난다. (물론 그러고도 소송은 들어온다. 이번에도 한 명이 소송을 걸었으니까.)
진짜 어려운 일은 개인을 lay off 하는 것. 아무리 개인감정이 없는 일 적 관계라지만 얼굴을 마주 보고 lay off를 통보하는 건 언제나 어렵다. 제법 많은 사람을 그렇게 내보냈음에도, 어렵다.
문제의 해당 매니저가 얼마나 단시일에 문제를 해결하고 정상 궤도에 올라올지 아직 모르겠다. 내 마음속에 그어 놓은 기한은 두 달, 그러니까 4월 말이지만.
이번주 내내 그가 고쳐야 하는 문제점들에 대해 상세히 정리한 문서를 작성하고 있다. 그의 업무를 상세 카테고리로 나누고, 내가 확인한 문제점들과 함께 언제까지 그것들을 해결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걸 위해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을 명시한 문서다. 매니저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에 대해서는 나보다 15년 정도 더 많은 경력을 가진 CEO의 판단이 옳을 확률이 높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불과 6개월 만에 팀의 리더를 두 번이나 바꾸는 게 옳다고 보지 않고, 그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으며, 무엇보다 그에게 충분한 기회와 지원을 해 준 다음 판단을 하고 싶다는 게 내 입장.
어찌 되었든, 고등학교 때 Football 팀 쿼터백을 했다고 하는 어마어마한 덩치의 소유자인 그가 이번에도 그의 팀과 그 자신을 승리로 이끌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