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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마을 Nov 05. 2024

개천에서 용 나는 곳

*벌써 1년도 더 전에 있었던 일인데 이 때 썼던 글을 깜빡 잊고 올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우연히 작가의 서랍에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뒤늦게 올립니다 *




지난 9월에 회사의 Board of Advisory 멤버들과 경영진 간의 저녁 식사가 있었다. Board meeting 후 이어진 식사였는데 VP가 된 지 1년밖에 안된 내게는 아직 부담스러운 자리였다. 서부지역 회사들이라면, 특히 실리콘벨리에 위치한 회사들이라면 아닌 경우도 많겠지만 동부의 보수적인 회사들은 대부분 나이 많은 경영진과 이사회를 갖고 있다. 이날 모인 사람들 중 내가 제일 어렸는데, 40대는 내가 유일했다. 경영진들 중에는 50대도 있었지만 보드 멤버들은 모두 60대 이상이었고 70대인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회사 업무 이야기가 아닌 다른 주제에 대해서 그들의 아들뻘이었던 나는 대부분 경청하는 입장일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다. (덕분에 이날 내가 주문한 Roasted Branzino는 정말 맛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 밖에 못 먹었다.)


여러 대화중 대단히 인상 깊게 들은 조언이 있었는데, T라는 보드 멤버 중 한 명이 나와 내 아이들의 나이를 들은 뒤에 내일 당장 부자가 되려 하지 말고 내 아이들에게 아버지인 내 삶이 세월이 지나면서 어떻게 나아져 가는지 보여줘라 는 말을 했다. 


당장 내일 부자가 되려 하지 말고 내 아이들에게 아버지인 내 삶이 세월이 지나면서 어떻게 나아지는지 보여줘라


그의 부연 설명을 짧게 요약하면, 아이들로 하여금 자기가 초등학생일 때 우리 가족은 방 두 칸짜리 오래된 아파트에 살았었는데 중학생이 될 무렵 마당이 있는 주택으로 이사를 가고, 고등학생이 될 무렵은 차도 좋은 것으로 바뀌더니 여행도 자주 다니게 됐고, 자기가 대학생이 된 후에 보니 50대가 된 부모님이 커리어 측면에서나 경제적인 측면에서나 정말 여유 있어 보이고, 30대가 되어 아이를 키우기 시작하며 보니 60대인 부모님이 "나도 나이 들면 저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여유 있고 넉넉한 그러면서 이웃을 도와주는 멋있는 사람들이라는 걸 깨닫게 해 주라는 것. 그러면 그 깨달음이 자기의 아이들에 대해 더 나은 삶의 태도를 갖도록 가르치게 되는, 세대를 가로질러 Family가 더 나아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고 했다. 설사 재산 측면에서 나아지지 않더라도 그만큼 더 오랜 시간 세상을 살아온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여유와 이해를,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나아지는(이웃과의 관계든, 가족과의 관계든)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삶을 보여주는 건 대단히 중요한 가르침이라고.


이어진 다른 보드 멤버의 말은, 부를 비정상적으로 빨리 쌓으려 하면 반드시 탈이 나지만 시간을 들여 쌓은 부는 탈이 나지 않는다였다. 가장 좋은 건 세대를 거쳐가며 부를 쌓는 법을 익히고 아이들도 그렇게 교육하는 거라는 이야기. 스타트업을 하더라도 자신의 꿈을 위해 해야지 단지 돈을, 그것도 젊은 나이에 큰돈을 벌기 위해 도전하면 그 끝이 좋은 경우가 별로 없다고 했다(보드 멤버 중 한 명은 다른 Venture Capial의 이사이기도 했다). 요약하면 자녀에게 가르쳐야 하는 건 삶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태도이지 당장 큰돈 벌 직업이나 수단이 뭔지 알려주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 젊을 땐 부모에 비해 가난한 게 당연하다는 진리를 알게 하라고 했다. 현재의 가난을 부끄러운 것이라 생각하지 않게 가르치라고 했다. 당장 Chairman인 회사의 창업자만 해도 그의 자녀들은 각자의 삶을 살고 있지 아버지의 회사에서 한자리 차지하고 있지 않다. CEO의 자녀들은 멀리 다른 주에서 다른 회사의 말단 영업 사원으로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그는 그렇게 고생하는 아들들의 모습을 대단히 자랑스러워했다.


40대인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단순히 60대 혹은 70대 꼰대들의 레퍼토리라고 치부하기엔 이 날 내가 들은 조언은 무척이나 큰 의미로 다가왔다.


30대 초반에 박사 학위를 받고 career를 시작한 내 입장에서 아이들이 커가는 걸 보면서 내가 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조바심이 들고는 했었는데 따지고 보면 나는 지금까지 일한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일해야 한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그 긴 시간을 이전보다 많은 연봉과 높은 career ladder를 거치며 일할 것이기에 내가 쌓을 자산이든 만들어갈 삶의 형태든 지금보다 나아지면 나아졌지 후퇴할 일은 별로 없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오늘 당장 내가 가진 것에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다. 걱정해야 하는 건, 내 아이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라는 측면에서 나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자라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부분이었다.


걱정해야 하는 건, 내 아이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라는 측면에서 나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자라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부분이었다.


그날 저녁 식사에 함께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비교적 최근(그러니까 몇 세대 안쪽..) 미국에 이민온 이민자의 후손이거나 본인이 이민 1세대인 사람들이었다. 대부분이 내가 보기엔 어마어마한 부를 쌓은 사람들이었는데 혼자 시작해서 하루아침에 부자가 된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우리 회사의 CEO는 젊은 시절, 그리고 결혼한 이후에도 한동안 자리를 잡지 못하고 이 주에서 저 주로 4~5번이나 이사를 다녀야 했다. 


그들이 내게 공통적으로 했던 말은, 내 삶이 시간이 흘러가며 나아지듯 내 가족의 삶도 세대를 거쳐가며 조금씩 더 나아져야 하지 않겠냐였다. 




개천에서 용 났다는 한국 표현이 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개천에서 용이 날 때, 과연 혼자만의 노력으로 되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지. 한 명의 용을 내기 위해 많은 부모 세대들이 노력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Image source: https://kids.donga.com/mobile/?ptype=article&no=90201508312339]


주마다, 지역마다 문화가 다른 미국이니만큼 이게 미국 문화다라고 말하기는 조심스럽다. 어쩌면 태생부터 Gold rush의 DNA를 품고 있는 서부는 보수적인 유럽 문화를 갖고 있는 동부와 다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여기선 내 삶을 낫게 만들기 위해, 내 가족의 앞으로의 삶을 낫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가시적인 결과물들을 손에 움켜쥐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여기는 월급쟁이로 살아도 답이 나오는 나라" 다. 내 아내는 미국에서의 본인 커리어를 위해 근처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함께 공부하는 이들이 아내와 비슷한 나이거나 더 많은 경우도 왕왕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삶을 낫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심지어 아내를 가르치는 교수 중 한 명은 그렇게 혼자 힘으로 공부해서 한 계단 씩 밟아 올라간 끝에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사람이다. 그 교수는 수업시간마다 현재 상황에 좌절하지 말고 노력하면 반드시 결과를 볼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단다.


미국의 빈부 격차는 대단히 높은 수준이다. 하지만 단순히 빈부 격차를 논하기에 앞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건 바로 미국이 매년 막대한 수의, 다양한 나라와 문화권 출신의 이민자를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렇게 넘어온 이민자들의 상당수는 가진 자산이 많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수대에 걸쳐 부를 쌓아온 사람들과 이제 막 맨주먹으로 미국땅에 랜딩 한 사람을 비교하면 당연히 차이가 난다. 당장 나만 해도 미국에 랜딩 했을 때는 손에 들고 있는 게 별로 없었다. 물론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착취한다는 인류 역사에 새겨진 뿌리 깊은 사회 문제도 있다. 하지만 나보다 많이 가진 사람들에 대한 감정을 옆으로 치워두고, 내가 노력해서 내일의 내 삶을 어제의 내 삶보다 낫게 만들 수 있느냐 하는 현실적인 질문에 집중해서 보면 미국은 여전히 기회의 땅이 맞다. 여기는 노력하는 사람에게 결과가 돌아가는 곳이다. 미국도 예전만 못하다는 말이 많으나 내가 보기에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기회의 사다리를 잡고 올라가고 있고 그런 사다리를 더 만들어 주려 노력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다. (예전엔 얼마나 더 대단했다는 걸까 궁금하기도 하다.)


내가 노력해서 내일의 내 삶을 어제의 내 삶보다 낫게 만들 수 있느냐 하는 현실적인 질문에 집중해서 보면 미국은 여전히 기회의 땅이 맞다. 


더 나은 삶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하는 짧은 질문은 긴 답변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단순하게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사는 삶을 더 나은 삶이라고 정의한다면 내가 경험하고 있는 미국은 내 노력으로 내가 그리고 내 아이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나라다. 


나는 내 삶이, 내 아이들의 삶이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 지켜볼 수 있을까? 그러기를 바란다. 그리고 내 삶도, 내 가족의 삶도 세대가 흐르면서 점점 더 나아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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