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라고 묻는 것
탈진실이라는 말이 주위를 점점 더 많이 떠돌고 있다. 이 책을 읽기 바로 전에 읽은 책이 손석희 씨의 <장면들>이라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까, 생각했지만 그 이전에도 저 단어에 대해서 들어 본 기분이다. 영어로는 Post-Truth라고 불리는데, 있는 대로 풀이하면 진실 이후라는 뜻이 될 테다. 한국어로는 탈진실이라고 번역되는데, 영어로 구글에 검색해 보니 '진실에 근거한 것보다 본인의 주장이나 감정, 신념에 부합하는 것들을 더 선호하는 상황'이라고도 정의되기도 하고, '진실을 말하는 자들의 권위에 대한 주기적이고 역사 깊은 대중들의 불안'이라고 정의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둘 다 어떤 개념에 대해 이야기하는지 사뭇 잘 느껴지는 정의가 아닌가. 전자의 정의를 가리키는 단어로는 확증 편향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Post-Truth라는 단어의 뜻에도 어느 정도 포함이 되는 듯하다.
탈진실 시대가 왔다고들 이야기한다. <개소리는 어떻게 세상을 정복했는가>에서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장면들>에서도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하여튼 저널리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두 책에서 공통적으로 언급한 이 탈진실 시대라는 것은 과연 무얼 말하는 걸까. 두 책을 전부 다 읽어 본 나는 탈진실 시대라는 것에 대해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시대(접한 정보가 진실이 아니어도 개의치 않고)'라고 나름의 이해를 했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할 때면 나는 자주 익숙한 모습을 목격한다. 유무선 이어폰을 꽂고서 유튜브를 보는 것은 이제 익숙하다 못해 질릴 정도인 풍경이지만, 개중에 조금 특이한 것들이 있다. 음악을 듣거나 드라마를 보는 것이 아니다. 눈을 감고 화면 속 사람이 무어라고 끊임없이 외치는 것을 듣고 있는 분들이 있다. 화면 속 사람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지만 움직임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 계속 뭔가를 듣고 있는 사람들. 강렬한 원색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소리치고 책상을 내리치고 진중하게 어딘가를 바라보며 말한다. 나는 이어폰을 꽂고 있는 사람들이 그 영상을 단지 듣기만 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꼭 먹는 것 같았다. 먹어서 본인의 신체 일부로 만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영상을 섭취하고, 그 안에 있는 생각과 감정을 본인 안에 스며들도록 두는 것만 같았다. 눈을 감고서, 지하철의 일정한 리듬에 흔들리며. 아무런 의식적 통제도, 절제도, 견제도 하지 않은 채로. 옳은 것을 더 옳다고 믿기 위해서. 그게 진실인지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아주 간단한 거짓도 실제가 아님을 증명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저자인 제임스 볼은 이야기한다. 거짓말은 하기 쉽지만 거짓말로 인해서 피해를 입은 사람은 그게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온 생애를 끌고 와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하는데, 그렇게까지 해서 사실이 아님을 입증해도 사람들은 별로 집중하지 않는다고 책은 이야기한다. 이 책은 뿌리 깊은 언론계의 모순과 악순환, 그리고 진실이 아닌 모든 것들이 세계에 어떻게 영향을 미쳐 왔는지를 밝힌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정말 많고, 저자가 미국 사회에서 겪은 격동의 시기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게 쓰여 있다. 개인적으로도 무척 인상 깊고 재밌게 읽은 지아 톨렌티노의 <트릭 미러>도 2016년 미 대선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저자가 뉴요커 작가이다.) 여기에서도 그때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사실상 그때의 이야기를 위해서 이 책을 적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등장하는데, 그 시절에 이루어진 어마어마한 일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다 보면 절로 몸에서 힘이 빠지고 인간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 시작한다.
2016년 미 대선만큼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이 또 하나가 있는데, 그건 바로 영국의 EU 탈퇴, 브렉시트에 관련한 것이다. 분명히 우세했던 EU 잔류 세력이 탈퇴 세력에 밀리게 된 이유를 추측하고, 그 과정에서 개소리(Bullshit)들이 어떤 역할을 해 왔는지를 되짚어보는 저자의 통찰은 내가 평생 가도 따라잡지 못할 정교함을 가지고 있다. 이 정교함은 책의 마지막까지도 빛을 발하는데, 이 책의 372p부터 397p까지는 모두 빽빽한 링크로 채워져 있다. 이 책이 적어도 '사실'에 근거해 적혔음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발언의 출처 링크를 적어 놓은 것이다. 마치 의심하지 말라고 나한테 소리를 지르는 것 같은 웹 주소들이었다.
중후반부까지가 제목 그대로 '개소리가 어떻게 세상을'에 대한 이야기라면 최후반부는 '그렇다면 이런 세상에서 사는 나는?'에 대한 이야기이다. 기자로 살아온 굴곡 많은 인생에서 깨달은 몇 가지 팁들을 족집게 강사처럼 알려주는 챕터인데, 당연히 독자들에게는 이것이 매우 유익하게 느껴질 것이다. 이 챕터에서는 저자가 독자들이 개소리를 퍼 나르지 않을 수 있는 쉬운 방법들부터 적극적인 방법까지를 소개한다.
가장 실천하기 쉬운 것 중 하나를 예로 들자면 바로 '제목만 보고 무작정 뉴스를 공유하지 말고 5~10초 정도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자'이다. 한 마디로 미디어 리터러시 능력을 길러달란 소리가 아닌가 생각했지만 정확히 그게 맞는 듯하다. 주요 뉴스 매체인지 확인하고, 관계자가 실제로 그런 말을 했는지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개소리를 공유할 확률은 현저히 낮아진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해결책 중에서 내게 특별히 와닿은 것은 바로 필터 버블에서 빠져나오자는 것이었다. 필터 버블은 SNS 이용자의 오랜 숙명 같기도 하다. 즐기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굳이 내가 싫어하는 것을 볼 필요가 없다는 의식 하에 나는 내가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최대한 외면해 왔다. 나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고, 당연히 알고리즘은 그런 나를 위해 내가 원할 만한 것들만 가져오게 된다. 알고리즘은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 정말 있었던 일인지 아닌지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는 수많은 거짓들이 흘러왔을 수도 있다. 나는 이미 필터 버블 속에서 '나는 거짓과 진실 정도는 구분할 정도는 돼'라고 믿으며 유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아침, 지금은 새벽이니 정확하게 말하면 어제다. 어제 아침에 한 아이돌 멤버가 소속사 사이트를 통해 심경을 토로하고 입장을 밝혔다. 밥을 먹다가 자신에 대한 허위 보도(이렇게까지 써줘야 하나 싶다. 그냥 개소리다.)를 발견했고 어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출처도 알 수 없고, 본인조차 알지 못했던 일에 대해서 떡하니 써 놓은 기사를 밥 먹다 발견했다는 그 아이돌은 얼마나 기가 막히고, 또 속이 말이 아니었겠는가. 다행스럽게도 소문은 빠르게 진압된 듯했지만 찰나 그가 느꼈을 절망과 허탈감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공든 탑을 쉽게 무너뜨리고 남이야 어떻든 트래픽을 늘리기만 하면 되니 실컷 개소리나 해대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 시대다. 우린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경각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나를 위한 행위이니 충분히 해볼 만한 것이 아닌가. 함부로 짐작하지 않고, 함부로 믿지 않는 것. "진짜?"라고 한 번 더 물어보는 게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일 리 없다. 해 보자는 거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여담으로 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을 고려한다면 이보다 좋은 권장 도서가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