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
※영화 스포일러에 주의하세요
정말 피 흘리고 눈 감고 땅에 묻히는 걸 보여주기 전까지는 죽은 게 아니라고 말하듯, <반지의 제왕 : 두 개의 탑>은 설산에서 치러졌던 간달프와 발록의 전투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니, 순진한 내가 또 속았구나. 하긴 간달프가 그렇게나 빨리 영화에서 퇴장했다면 그 이름이 이토록 유명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가장 헌신적이었던 조력자가 팀원을 위해 희생한 후 죽음의 문턱 앞에서 초월자가 되어 돌아오는 전개는 놀랍지 않다. 내가 어렸을 적 읽었던 학습 만화에서도 이런 식으로 돌아오는 마법사가 있었는데, 혹시 원본이 간달프였던 것일까? 아닌 게 아니라 그게 맞는 것 같다. 그는 이제 회색의 마법사가 아닌 백색의 마법사이다. 사우론과 결탁해 이성이 마비된 사루만은 이제 현자라고 불릴 수 없는 지경이니 세대교체가 이뤄진 것일까.
이번 편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 반지 원정대가 그들 나름의 성취를 이루는 과정들로 꽉꽉 들어차 있다. 마지막에 갈 즈음엔 어쩐지 눈시울이 시큰해지는 것이, 나는 아직도 권선징악이 좋고 사람과 사람과의 유대가 좋고 협력과 화해가 좋은 사람인 모양이다. 흩어진 원정대 팀원들은 각각의 이유로 중간계에 있는 다른 종족들, 다른 나라들을 돕게 된다. 아르곤이 있는 팀은 간달프의 인도 하에 국가 로한의 부활을 돕게 되고, 피핀과 메리가 있는 팀은 사루만의 군대에 끌려갔다가 생각지도 못하게 나무 정령 엔트들의 도움을 받게 된다.
나는 이 글의 제목에 대한 영감을 피핀과 메리가 나오는 장면에서 얻었다. 엔트들은 처음에 소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소란에서 발을 빼려고 하지만, 피핀과 메리는 그들에게 불타버린 숲을 보여준다. 학살당한 동료들을 생각하며 서글픔을 느낀 엔트는 사루만의 군대에 대한 투지를 불태우곤 동료들과 함께 전쟁에 참여하기로 마음먹는데, 그때 하는 말이 인상 깊다. "가자, 엔트들도 전쟁을 시작해야겠다. 그런데 어째서 죽으러 가는 기분이 드는 걸까." 부활은 죽음과 직결되어 있다. 죽어야만 부활할 수 있고, 부활해야만 명예롭게 죽을 수 있다. 다시 태어나듯 눈을 뜨자마자 죽음이 만연한 전쟁터에 나가야 한다. 하지만 그래도 나아간다. 명예로운 죽음을 향하여. 두 개의 탑 편은 대체로 이런 식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프로도와 샘은 이 영화의 마스코트나 다름없는 캐릭터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바로 골룸인데, 그는 처음에 프로도에게서 절대 반지를 빼앗으려다 도리어 제압당하고 만다. My Precious를 입에 달고 사는 그는 원래 호빗이었고, 절대 반지를 손에 넣고 난 후 우리가 아는 그 모습으로 변한 것이었다. 프로도는 그런 골룸이 다시 호빗으로 변할 수 있다고 믿고 그가 호빗이었을 적 이름도 알아내 불러준다. 그런 프로도의 태도에 감동받은 골룸은 그를 주인으로 모시며 험한 길이든 지름길이든 극진히 모시는데, 그는 와중에 프로도 모르게 이중인격적인 모습을 보인다. 프로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싶은 자아와 절대반지를 빼앗아버리고 싶은 자아가 충돌할 때마다 화면 속에서 골룸은 언제나 두 명이다.
1편인 반지 원정대 편의 초반에 등장했었던 대규모 전투가 다시 한번 일어날 것임을 예견하듯이 이번 화는 주인공들과 사우론에 맞서는 세력이 서로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우론과 사루만의 마수가 곳곳에 뻗쳐 있는 중간계의 그림자를 주인공 일행들이 걷어내는 것이 이 편의 모든 내용이다. 등장하는 인물들 중 완전히 타락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으나 주인공에 의해 구제받지 못한 인물이 딱 하나 있는데, 그는 바로 골룸이다. 자아와의 싸움에서 고통받다가 그는 마지막에 프로도 일행을 떠나 어디론가 가버리며 마지막 편을 예고한다. 아마 그는 마지막 편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낼 것 같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이쯤 되면 두 개의 탑이라는 제목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두 개의 탑은 사우론의 탑과 사루만의 탑이다. 이 중 사루만의 탑은 이번 화에 의해 무력화된다. 중간계의 여러 국가와 종이 뭉쳐 전쟁을 벌이는 와중, 나무의 정령인 엔트가 막아놓았던 댐을 터뜨리는 것으로 사루만의 군대는 싹쓸이당하다시피 한다. 사루만은 군대를 만들기 시작했을 적, 부하들에게 산의 나무를 전부 다 베어버리도록 명령했고 영화에서도 그것을 꽤나 집중적으로 보여준 바 있는데 그것을 생각하면 이 장면은 상징적이다. 무분별한 개발의 마지막 모습은 이런 것일까. 사루만은 휩쓸려가는 자신의 군대와 업적들을 탑의 높은 곳에서 허망하게 바라만 보다가 이내 겁에 질린 듯 도망친다. 그는 직접 싸움에 나선 적조차 없다. 최악의 지도자다.
이전 리뷰에서 이 영화의 이름이 왜 반지의 제왕인가에 대해 생각해 본 바를 적었었다. 그리고 프로도는 내가 그 리뷰에서 짐작했던 것과 비슷한 상태가 되어 이번 편 내내 얼굴에 어두움을 드리우고 있는다. 반지와 오래 함께 있었던 프로도는 반지가 점점 무거워진다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샘에게서 반지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라는 소리도 듣는다. 하지만 1편의 간달프가 후반부에 더없을 명언을 남겼듯, 이번엔 샘의 차례다. 최고의 조력자에 이어 최고의 친구가 주인공에게 인생의 이정표를 건네준다.
고통받는 프로도를 옆에서 지켜보며 샘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꿈도 꾸지 못했을 바깥으로 나온 것도 모자라 팔자에도 없던 절대 반지까지 얻어 이리저리 부딪히며 신음하는 친구를 지켜보는 그의 맘도 더없이 착잡했을 것이다. 나눌 수 있는 고통이 아니라면 곁에서 맨 정신으로 그것을 바라봐야 하는 사람의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는 법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 우리를 자꾸만 부활하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
죽음의 끝에서 백색의 마법사가 되어 돌아오도록 만든 힘은 무엇이며, 1만 명의 군사를 눈앞에 두었음에도 삼백 명의 군사들이 포기하지 않고 맞선 이유는 무엇이며, 그냥 다 포기하고 반지가 본인에게로 온 운명을 원망하고만 싶은데도 자꾸만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갑자기 007 Skyfall에서 제임스 본드가 한 말이 생각이 난다. 가장 잘하는 게 무엇이냐는 빌런의 말에 제임스 본드는 이렇게 말했다. 부활. 그가 자꾸만 시리즈에서 부활해야만 했던 이유도 이런 데 있을 것이다. 당연하지, 위대한 액션과 판타지의 주인공들은 모두 샘이 말한 이유 때문에 자꾸만 살아난다.
"하지만 이토록 두려운 순간조차, 지나고 보면 찰나일 뿐이죠. 나리가 들었던 옛날이야기에는 큰 뜻이 담겨있었어요. 옛날에는 이해하기 어려웠겠지만, 이제는 알아요.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선택의 기로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거예요. 끝까지 지켜내야 될, 소중한 꿈 때문이었죠."
프로도는 의아하다. 그에게는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느낌보다는 희생양이라는 느낌이 더 강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초반에는 주인공이라는 자각이 있었겠지만, 얼굴에 빛보다 그늘이 많아진 지금의 그는 너무나도 지쳤다. 샘도 울먹이고, 프로도도 울먹이고 있다. 프로도는 묻는다. 우리에게는 뭐가 소중하지? 모호하기만 했던 목표를 명확히 하려는 목소리는 떨리고 있다. 사생결단을 앞둔 사람이 떨리지 않을 리가.
"이 세상에 선이 존재한다는 믿음이요. 지켜야 하는 값진 이상 말이에요."
이다음에 이어지는 장면이 나를 울렸다. 영화 중반에 그들을 폭력적으로 제압하고 반지를 뺏으려 들었던 파라미르가 그들 앞에 무릎 꿇는다. 아마도 이젠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며, 포로처럼 잡고 있던 그들을 놓아주겠다고 결정한다. 파라미르의 뒤에서 신하는 이들을 놓아주면 국법에 따라 파라미르가 사형당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파라미르는 받아야 한다면 받겠다고 대답한다. 지켜야 하는 값진 이상 때문에 부활하는 자도 있지만, 죽는 자도 있다. 하지만 그 죽음은 분명 신념의 부활과 맞닿아 있다. (파라미르가 죽는 장면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죽었다고 속단하지는 않겠다. 나는 이미 간달프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아라곤과 프로도를 필두로 한 두 팀으로 나눠진 반지 원정대가 마지막에 어떤 결론을 가져오게 될지 나는 솔직히 모르겠다. '아니 제목이 그래도 반지의 제왕인데 진짜 반지가 없어지려나?' 하는 마음도 있고 '이런 사기템은 당연히 세계관에서 사라져야만 하는 것이고 그래야 평화가 찾아오는 게 국룰이다'하는 마음도 있다. 사실 후자가 될 것이라고 내심 생각 중이다. 주말 안에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을 보고 또 리뷰를 쓸 생각을 하니 신난다. 마지막 편은 마지막이니만큼 말이 많아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