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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숨 Dec 15. 2021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 유 머스트 컴 백 홈

아무 것도 아닌 반지 

※ 스포일러에 주의하세요.


모든 스토리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을 그린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정말로 그런 걸까. 영원히 떠나기로 마음먹고 석양 속으로 걸어가는 몇몇 서부극 엔딩을 생각하면 꼭 들어맞는 말은 아니겠지만 몇 개의 장르를 제외하면 모두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외면할 수 없는 사건을 목격하거나 맞이하게 되는 주인공들은 어떤 식으로든 선택을 하고, 그에 따른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런 스토리는 특히나 판타지와 SF에서 더 힘을 발휘하는 것 같다.


판타지도, SF도 우리가 익히 아는 일상을 배경으로 하지 않는다. 판타지의 세계는 우리가 아는 지구보다 넓어 보이고, 우주는 물어볼 것도 없이 더더욱 넓기 때문에 '집'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가 중요해진다. 까딱 잘못하다간 돌아올 수 없는 위험한 세계이기 때문에 더 간절한 것이 바로 집이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 배경인 영화라면 목숨을 위협하는 가장 흔한 것이라곤 차도를 쌩쌩 달리는 자동차 뿐일 터이지만 판타지와 SF는 다르다. 뻑하면 죽는다. 판타지에선 용이 꼬리를 한 번 휘두르면 수백 명이 추풍낙엽처럼 스러지고, SF 또한 스쳐 지나가는 작은 우주 쓰레기 때문에 사람은 목숨의 위협을 느낀다. 그 뿐이던가? 구글 맵스도 없는 세계에서 그들은 길을 잃으면 영원히 미아가 될 수도 있다.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은 주인공들이 그 위험천만한 세계에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이다.


잘생긴 아라곤…3편 동안 눈이 즐거웠다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의 식량 비축분을 마련해 두었다는 1편 속(2편이었는지도) 샘의 천진한 이야기가 귓가에 유독 맴도는 3편이었다. 이제 프로도와 샘은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몰골을 하고 있다. 너무 지쳐서 이제는 교과서적인 "세상에 선이 있다는 걸 믿으니 계속 가야 한다." 이런 말 따위도 하지 않는다. 이제 반지를 없앤다는 명료한 목적 하나만 가슴에 새기고 미친 사람처럼 걷는다. 이 와중에도 골룸은 절대 반지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해 언제쯤 프로도를 죽이고 반지를 차지할까 궁리만 하고 있다. 그가 혹시라도 주인공에 의해 구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나는 정말 순진한 인간이다.


생각해 보면 이 영화는 신기하다. 모든 것을 본인의 지배 하에 둘 수 있는 절대 반지라고 다들 이야기는 하지만 절대 반지는 그 힘을 명확하게 영화에서 드러낸 적이 없다. 그 반지를 가지고 힘을 휘두른 적 있는 존재는 영화 극초반의 사우론 뿐, 정말로 그것을 이용해 뭔가를 해본 사람은 1,2,3편을 통틀어 아무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끝이 장렬한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말 때문에 과하게 부풀려진 마케팅 상품처럼만 느껴지는 이 금색 반지는 제 힘을 내보기도 전에 용암 속에 녹아내리고, 그게 끝이다. 허무한 정도가 아니라 'ㅋㅋ이게뭐지?'라고까지 느껴질 수준이다. 이 반지가 영화의 모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등장인물들의 욕망의 주체가 되지만, 정말로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 파괴적인 일을 한 적은 없다. 그게 이 영화의 반전이라면 반전이겠고, 샘이 2편에서 말한 "세상에 선이 있다는 믿음."이라는 가치관 그 자체이겠다. 반지가 아무 일도 하지 못한 것은, 반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기본적으로 선했기 때문일 테니까. 적어도 욕망보다 신념이 앞섰기에 세상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게 아니겠나. 생각해 보면 영화 내내 반지를 짊어지고 모두를 위해 고행길에 오른 프로도라는 존재 자체가 선함의 증명인지도 모른다. 


내가 어렸을 적에 즐겁게 읽은 만화에서는 모든 것을 죽이고 베어버릴 수 있는 검이 나온다. 모든 걸 죽이고 벨 수 있는 검이라니, 듣기만 해도 무서운 이 물건을 여신은 누구에게 주어야 하나 고민하다가 '아무도 해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에게 준다. 어쩌면 당연한 결론인지도 모르는데 나는 이게 왜 이렇게 인상깊었는지 모르겠다. 검은 베기 위한 것이지만, 그걸 쥐는 사람은 그 누구도 해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니. 절대 반지도 이런 맥락일 터다. 모든 걸 휘두를 수 있는 반지는, 모든 걸 휘두르기엔 너무 약하고 작아 보이는, 세상을 사랑한 호빗에게 주어졌다. 반지를 쥐고도 세상을 호령할 생각이 없을 정도로 순박한 호빗이라니. 응원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다. 


아라곤의 행보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시종일관 이상적인 리더다. 연인을 두고 다른 이성에게 흔들리지도 않고, 나약한 자세를 보이는 다른 나라의 왕에게 적절한 조언을 할 줄도 안다. 이렇게 정 안 가고 잘생긴 캐릭터가 있을 수 있나 싶을 정도다. 하지만 이런 영웅적인 인물이 주변의 귀엽고 잘생긴 동료들과 함께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꿔나가니 또 응원을 안 할 수도 없고, 참 나. 캐릭터들이 매력밖에 없는 영화였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은 캐릭터가 누구였나 묻는다면 역시 김리다. 그린듯한 인물들 속에서 유일하게 투덜대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지도 못하게 입체적이었던 인물은 바로 파라미르이다. 그는 형이 죽은 이후, 형의 역할까지 대신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하지만 유달리 형을 아꼈던 아버지는 그런 파라미르를 본 체도 하지 않는다. 파라미르는 "보로미르 대신 제가 죽었어야 했다고 생각하시지요?"라고 아버지에게 꽉 찬 돌직구를 던지는데, 아버지는 거기에다 그렇다고 대답해버린다. 거대한 실망과 구체적으로 비관적인 상황을 등에 얹고 죽은 형을 대신해 전장에 나가는 동생의 운명이란 것은 어쩌면 뻔하다. 그는 반 송장이 되어 돌아와 화장당할 위기에 처하나, 간달프와 피핀에 의해서 구출된다. 그의 아버지는 파라미르가 화장될 뻔한 터에서 죽는다. 파라미르는 그제야 족쇄에서 풀려난 기분일지 어떨지 알 수 없지만(영화에서 알려주지 않았다) 그들의 이야기는 영화에서 이상하도록 긴 여운을 남긴다. 


이후에 나온 많은 판타지 창작물에 영향을 준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드디어 다 보게 되었다. 이렇게 기록까지 남겼으니 더없이 기쁘다. 리뷰가 늦게 된 건 변명할 것도 없이 내 게으름 때문이다. 프로도의 삼촌인 빌보 배긴스가 주인공인 호빗도 시간이 나면 볼 예정이다. 엘프의 포근한 이불 안에서 눈뜨던 프로도의 파란 눈동자처럼 상쾌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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