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아이는 어쩔 수 없는 편애의 대상이다. 나와 남편 둘만의 시간이 되면 윤서가 얼마나 기발한지. 그리고 만들어 내는 것들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누가 들을까 조용조용 나누곤 한다.
우리 부부는 시댁에 방 한 칸을 빌려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방학이 되면 아이들까지 끌고 출근한다. 이제 막 가슴이 봉긋해오기 시작한 윤서는 겨울방학이 되자 겨울잠 자리 잡으려는 곰마냥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다. 소파 구석, 책상 아래, 식탁 밑 등에 담요며 가방 같은 것들을 끌고 들어가다 우산까지 펴서 칸막이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다 안착한 곳이 30년쯤 된 시어머니의 장롱이다. 할머니의 장롱에서 이불을 다 끄집어내고 이런저런 물건을 죄다 물어다 놓고 둥지를 틀었다. 형님이 시집올 때 해온 예단이었던 베개는 등받이가 되어있다. 큰 시누가 시집가며 해준 누비이불도 한쪽으로 대충 구겨져 있다. 첫째가 아기 때 쓰던 낮은 베개와 시댁 와서 자고 갈 때 셋째가 쓰는 베개도 그저 둥지 짓는 재료다. 장롱 안이 어둡다며 땡글땡글 눈알을 한참 굴리더니 급할 때 연락하라고 사준 휴대폰을 천장에 떡하니 거꾸로 붙여놓고 조명으로 쓴다. 그러고는 무척 마음에 든다는 듯이 제 살림을 잔뜩 끌고 할머니의 장롱 안으로 기어 들어간다. 언젠가 열이 올라 아픈 식구에게 사다 줬던 죽통에 색연필, 스티커 같은 것을 잔뜩 넣고 보물함 대하듯이 하는데, 누비이불 제일 위에 자리 잡았다. 책상에 칼자국 내지 말라고 사준 고무매트는 간이 책상이 되었다. 사촌 언니가 쓰다 싫증 나서 치워둔 샤프를 들고 종이를 한 장 펼친다. 한참 끄적이다 뭔가 잘 풀리지 않으면 손 안의 필기구를 살살 돌린다. 그럼 곧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잔뜩 웅크리고 무언가 열심히 적기도, 그리기도 한다.
늘 언니 근처를 맴도는 막내는 언니가 만든 아지트를 보고 부러움과 질투에 그만 눈물이 차오른다. 할머니의 장롱이 세 짝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언니가 차지한 이불장 옆칸을 헐어 더 멋진 둥지를 짓고 싶다. 방석을 놔보고, 인형을 들여놔도 언니 것처럼 눈에 차지 않는다. 나는 왜 휴대폰이 없어서 저 멋진 조명을 달 수 없는 걸까. 볼이 잔뜩 부어오른 진서는 절친에게 소근소근 속마음을 털어낸다. 늘 웃는 얼굴로 들어주고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는 '알이'는 언니에게는 없는 오로지 진서만의 친구다. 오늘따라 신세한탄이 길어진 게 '알이'에게 미안했는지, 긴 속삭임 끝에 한 상 차려 대접하기로 한다. 국을 끓이고 계란 프라이를 부친다. 채소를 잘 먹어야 건강하다. 간이 맞는지 엄마에게 확인받고 혹시나 '알이'입맛에 안 맞을까 소금 한통 상에 올린다. 목 메이지 않게 물도 한 잔 떠와 소박하게 차려냈다. 대접하는 마음이 이렇게 기쁠까. 정성을 받는 사람보다 들인 사람이 더 행복하다는 걸 진서가 뿌듯한 미소로 알려준다.
아빠 키를 훌쩍 넘어선 아들에겐 어느 날부터 장막이 한 겹 둘러졌다. 걷어 올리기 힘든 그 막을 나는 늘 애타는 마음으로 바라본다. 장막 안의 너는 어떨까? 아직도 물어뜯는 손톱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나의 눈길을. 엉성한 젓가락질을 무시하는 나의 잔소리를. 그 안의 너는 그저 조용히 참아내고 있겠지. 철마다 속옷에 겉옷에 다 챙겨주시려는 할머니의 부담스러운 손길. 우리 집 장손. 제사 지낼 네가 아들을 낳는 것까지 보시겠다는 할아버지의 말씀. 모두 착하게 참는 것이지. 오빠에게 물려받은 못생긴 내복바지를 아무렇지 않게 입는 딸아이들은 애틋한데, 늘 새것을 받아도 편치 않은 너의 마음을 엄마는 어쩜 이리 몰라주는지.
도서관 가자. 카페 가자. 싫은 내색을 못 본 척 아들에게 또 참으라 한다. 그래도 착한 너는 다 같이 한 손씩 보태 만드는 별에 기꺼이 끼어주고, 동생들의 소란과 엄마의 호들갑을 점잖게 보아 넘긴다. 네가 두른 경계 안으로 가끔은 나를 초대해 주길. 공손한 손님으로 의무감 없이 다정하게 지내고 싶다.
나의 불안감이 무색하게 태평한 것이 남편의 장점이다.
아이들에 대한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걱정하고 있다 보면 그런 일은 생길 리 없고 생긴 들 우리는 잘 해낼 거라고 털털하게 말해준다. 가족들 모인 명절에 어린 삼땡이 들을 주르륵 앉혀놓고 화투짝 맞추기를 열심히 가르친다. 알록달록한 화투패를 손에 들고 너는 광팔이라 너는 3점이다. 세 똘마니 거느린 대장처럼 신났다. 돈 걸어 따먹는 인간이 잘못이지 화투 좀 치는 게 뭐 흠이냐며 부루마블에 가짜 돈을 잔뜩 꺼내서 고스톱 치느라 난리다. 점수 계산이 빨리 안돼서 안달 나기도 하고, 잘못 본 화투짝을 가져가서 판을 망쳐놓기도 하고. 막둥이 인형을 가져다가 "나 대신 패 잡아라." 한다. 아이들은 그 모습에 넘어갈 듯이 깔깔 웃는다. 한바탕 고스톱으로 똘똘 뭉쳐 즐거운 권가들을 보고 있자니 아무렴 어떠냐… 이만하면 되었다… 뭐든지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식구들 사진을 찍으며 나만 아는 비밀에 우쭐한 마음이 든다. 아무도 모르는 보석을 들여다보며 은밀하게 기쁘다. 좁은 집을, 셋씩이나 되는 아이를, 내외가 동동 거려야 간신히 꾸려지는 살림을 버겁다 생각할 때가 많지만, 사진첩에 쌓이는 반짝이는 순간들이 삼땡이네 잘 산다고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