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고 늘 술 한 잔씩 마신다. 버릇처럼 마셔서 내가 언제 안 먹는지 생각이 안 날 정도다. 언제부터 술을 좋아했는가를 돌이켜보면 돌아가신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가족 모임 때마다 술상이 차려지면 어린이였던 나에게 막걸리 반주씩 주셨는데 그게 계기였던 것 같다. 술이 몸에 안 좋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지만 막걸리 때문에 친가 모임이 간 것 같기도 하다. 어른들끼리 나누는 세상 이야기나 정치 이야기는 관심 없었지만 할아버지가 주시는 막걸리 한 잔에 담긴 달큰한 맛은 그 시간들을 참아내게 할 만큼 강했다.
어릴 적부터 술에 대한 내성이 없어서 미성년인 내가 술을 받는 게 이상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치매로 돌아가신 어머니도 내게 맥주 반 잔 같이 나누는 술친구였기도 했다. 오히려 커피를 마시지 말라고 다퉜지 술 때문에 싸운 때는 없었다. 아버지도 크게 말리신 일은 적었던 걸로 기억한다.
대학생이 되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가서 술을 진탕 마신다는 걸 경험했다. 술에서 깰 때, 머리가 핑핑 돌고, 가슴은 체한 느낌이 너무 안 좋았다. 하지만 술 게임을 하며 재밌는 노는 그 시간이 좋아서 한계 없이 술을 들이켰다. 좋지 않았던 술버릇이 여기서 생겼다. 취할 때까지 마시기. 그때는 그게 좋다고 생각했던 아둔한 시절이었다.
나쁜 습관을 고친 건 대전에서 열린 와인 박람회에서였다. 수많은 와인을 다 경험해 보겠다는 마음으로 마셔보았다. 많이 마셔서 취한 건지, 아니면 박람회를 오래 봐서 피곤했는지 생각이 제대로 안 되는 상황에서 어딘가 기대서 앉게 되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어깨를 흔들어 나를 깨웠다. 박람회 경비원이었다. 화들짝 놀란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핸드폰을 보니 잠든 지 2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너무 창피해 택시를 불러서 바로 숙소로 돌아갔다. 이날을 계기로 생각 없이 계속 술을 마시는 걸 그만두었다.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하면 안 된다는 깊은 교훈을 얻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만큼 마시고 금주를 하고, 술 박람회를 하는 날이면 입에만 머금고 개인 텀블러에 뱉는 스핏튠(Spittoon)을 챙기고 돌아다닌다.
그렇게 창피한 순간도 있었지만, 술을 멈출 수는 없다. 그냥 마시는 행위와 취기가 좋아서라기보다 이제는 다양한 술의 형태에 집중하고 있다. 별생각 없이 마시는 게 재미없어질 때 한 증류주 유튜버를 보게 되었다. 그가 술을 마시는 방법과 술을 묘사하는 언어나 단어에 매료되었다. 영상을 보고 정신 확 깨는 느낌을 받았다. 무의식적으로 마시기만 했던 술을 이제 의식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술에도 다양한 형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술이 가진 다양한 향, 잔에서 흐르는 모습, 빛에서 비치는 색깔 그리고 개성 있는 맛을 천천히 음미해 본다. 지루했던 음주가 이제는 연애하듯 대화를 통해 상대를 알아가는 즐거움으로 변화되었다. 이렇게 술을 끊지 못하는 작은 변명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