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샘 May 09. 2024

<미루기의 천재들>

미루고 또 미루면 이룰 리 없건마는 그래도 자꾸 미루는 것은...

-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찰스 다윈에서 당신과 나에게로 이어지는 미루기의 역사

앤드루 산텔라 지음, 김하현 옮김, 어크로스, 2019.



흐물흐물 늘어진 시계가 빨랫줄에 널려있다. 해와 달과 별과 새가 하늘에 떠 있으니 어느 한때가 아니라 온종일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 아래에 신사, 한 팔로 머리를 받치고 옆으로 누운 사람, 이젤 앞에서 붓과 팔레트를 든 사람이 왼쪽에 있고, Soon이라는 단어를 가운데 두고 오른쪽으로는 앙상한 나무 한 그루, 의자에 앉은 사람, 뒷다리를 뻗친 개 한 마리가 실루엣 형태로 그려져 있다.


단행본 책표지를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본 것도 오랜만의 일이다. 제목과 부제를 통해 왼쪽 인물들은 역사 속 미루기의 천재들이었고, 오른쪽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미루기에 최선을 다하고 있을 저자와 그 주변 인물이 아닐까 싶다. 역사에 남을 만한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미루기를 열심히 하는 그런 사람들. 시험공부를 하기로 마음먹고 책상 정리부터 하듯, 해야 할 일을 '곧' 할 거라며 자꾸 다른 일들을 먼저 열심히 하는 나 같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런 마음에 크게 공감해 주는 책을 만났다.


빨랫줄에 걸린 흐물거리는 시계는 축 늘어져 반만 보이는데, 상태를 보아하니 시간이 제대로 맞을 것 같지는 않다. 몇 년 전, 스스로도 놀랄 만큼 건망증이 극에 달하던 어느 날 옷 주머니에 버즈 프로를 케이스째 넣고 세탁기를 돌렸다. 빨래를 꺼내다가 헉, 하고 마음이 내려앉았다. 사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내가 가진 몇 안 되는 신상 중 하나였으니 속이 쓰렸다. 다행히 고장은 나지 않았다. 충전이 되다가 말다가 어설프게 작동하기에 AS 센터에 갔더니 물이 들어간 걸 귀신같이 알아낸다. 고치기는 어려우니 충전 케이스만 따로 구입하든가 그냥 쓸 수 있을 때까지 쓰라고 한다. 예상보다 비용이 제법 들어가니 아쉬운 대로 그냥 쓰기로 했는데, 지금까지 별문제 없이 잘 쓰고 있다. 완벽한 상태가 아니라도 사용하는 데 큰 지장이 없다. 시계가 고장 나도 시간은 흐르는 것처럼, 미루고 미루는 느린 시간 개념을 가져도 삶은 어찌어찌 살아진다.


<미루기의 천재들>은 찰스 다윈이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사례를 들어 미루기를 잘하는 사람들이 느린 시계를 가지고도 천재적인 업적을 남길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미루기 잘하는 우리에게도 어쩌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 미루기는 시험공부를 위한 책상 정리처럼 미루는 일을 더 잘하기 위한 시간, 어쩌면 천재적인 업적을 남길 수도 있는 궁리의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


건강검진을 미루는 것부터 숙제를 미루거나 마감해야 할 원고 쓰기를 미루거나, 여행 계획 짜기를 미루는 것 같은 우리 모두의 미루기는 다 이유가 있다. 해야 할 일을 하려 하면 이상하게 더 급한 일이나 먼저 해치워야 하거나 혹은 진작했어야 하는데 잊고 있었던 일들이 생각난다. 지금 하지 않으면 또 잊어버릴 것 같아서, 정작 해야 할 일을 미루고 덜 중요한 일들을 한다. 금방 끝날 것 같은 일이니 곧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가지고서. 


그러나 그런 일들은 생각보다 쉽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책상 정리를 하던 중 지난번에 찾다가 도저히 못 찾은 물건을 발견하면 그때 못했던 일을 지금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 필요한 자료가 있어 딱 하나만 검색하기로 했는데, 그날따라 내가 평소 궁금하거나 언젠가 시간이 되면 찾아보려 했던 주제의 제목이 자꾸 눈에 띈다. 지금이 아니면 놓치거나 잊을 것 같은 불안함에 가상의 세계에서 열심히 서핑을 하고 유튜브의 알고리즘에 현혹당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저자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꾸물거리며 해야 할 일을 미루 습관은 정작 중요한 일을 제쳐놓고 쓸데없이 바쁜 일상을 낳는다. 심리학의 조언을 참고하자면, 완벽주의자 중에 미루기를 잘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 준비가 길어지다 보니 정작 해야 할 일이 자꾸만 뒤로 밀린다는 것이다. 미루고 후회하지만 또 미루게 되는 이 습관을 어떻게 해야 할까? 미루는 동안 우리는 마냥 시간만 허비하는 것일까?

 

책을 읽고 나면, 미루기가 꼭 나쁜 것 같지만은 않다는 다소 자신 없는 결론이 생긴다. 저자는 찰스 다윈이 머물던 시골 마을을 둘러본 뒤 뛰어난 영감이 떠오를 것만 같은 그곳에서 느긋하게 산책하고 싶었다. 그날의 일정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지만 언제 다시 그곳에 올지 모르니 지금 이 순간에 할 수 있는 일(산책)을 하고, 해야 할 일들(오후 일정)을 미루고 싶었다. 걸으면서 영감을 얻고 싶은 마음과 돌아가서 해야 할 일들 사이에서 갈등하며 이쪽, 저쪽 갈지 자를 그리던 저자는 마침 자신을 보고 다가온 우버 기사 덕분에 다윈처럼 천재가 될 수 있는 '미루기 산책'을 포기하고 만다.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보다 덜 중요한 것이라도 뭐든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목표가 확실하다고 해서 그 목표만을 바라보고 살기엔 뭔가 좀 억울하다. 목표와 상관없는 엉뚱한 일들도 좀 해보고, 에둘러 가기도 하면서 방향만 잃지 않으면 다시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게 삶의 소소한 재미가 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누구나 경험했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지도 모르는 일, 미루기.

일분일초가 아깝다며 자기 성장과 계발에 대한 관심이 높고 시간 강박이 갈수록 심해지는 이 시대에 미루기는 어쩌면 속 편한 소리로 들린다. 잘 미루는 사람은 겉으로는 한없이 느긋하게 지내는 것 같아 보여도 그 속은 혼자 타들어갈지도 모른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걸 그 누구보다 자기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해야만 하는 일보다 다른 일에 더 끌리고, 그런 자신의 태도를 합리화하기 위해 온갖 이유를 다 생각해 내는 우리는 어쩌면 '미루기 천재'인지도 모른다. 미루고 미루다가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때에야 겨우 해치운 일들이 의외의 성과를 낼지도 모른다. 분명히 가지고 있지만 아직 드러나지 않은 우리의 천재성을 미루기를 통해 확인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상상은 오늘의 미루기에 대한 즐거운 변명이 된다.  


그러니 미룬다고 마냥 자신을 비난하지 않아도 좋다.

미루고 또 미루어도 자책하지 않고 자기 속도대로 살아가다 보면 놓치는 것도 있고 얻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몇 주간 글쓰기를 게을리한 나는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미루고 있었던 것이라고 변명을 해 두자. 글쓰기를 미루다 이 책을 만났으니 미루기를 완벽주의자의 꾸물거림이 아니라 천재들의 숙고쯤으로 긍정적으로 바라볼 기회를 얻은 셈이다. 그렇게 나의 미루기는 합리적 이유를 획득한다.

세상에는 핑계 없는 무덤이 없는 법이니, 이 정도면 훌륭한 핑곗거리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콰이어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