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1460일, 나의 시간을 바라보다
파릇파릇 어렸을 20대만 해도 30대나 40대
나, 거기서 거기인 다 같은 아줌마 아저씨 언저리의 나이인 줄 알았다. 그래서 나의 20대는 조급증이 심했다. 남보다 앞서 미래를 위한 굳건한 초석을 다져놓아야지. 그러려면 이것 저것 따져서 최적의 안전한 선택을 해야지. 마치 적금을 붓듯이 지금의 시간을 절제하고 계획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실패한 인생을 살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매 선택에서는 무지한 나의 생각 보다는 주변 사람의 의견을 듣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고 결국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 고심에 고십을 거듭해 보면 그저 평범하고 안전한 길을 택했다. 그 당시에는 마음이 편했다. 튈 일을 없으니까, 남들 하는 만큼 하는거니까... 그리고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항상 뒤로 미뤄뒀다. 언젠가는 이룰 수 있을 꺼야. 언젠가 빛을 발할 날이 올꺼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며, 선택의 불안함과 결과의 책임감에서 항상 한 발 물러나 있었다.
하지만 30대의 끝자락에서 뒤돌아보니 사실은 안전한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남에게도 큰 거부감과 저항이 없는 무난한 길을 택하게 된 것 같다. 열심히 살아왔다고 도취되어 살아왔을 뿐 나는 그냥 도전이 두려운 젊은 꼰대에 지나지 않은 소심한 안전주의자였던 것이다. 목적도 모른채 열심히만 하면 하면 된다고 스스로 느끼는 성장이 가치 있다고 자위해 왔을 뿐, 내가 정이했던 실패한 인생이 지금의 내 모습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요즘 이런 허망하고 헛헛한 마음으로 40대를 어떻게 맞이할까 두려움에 몸서리 치는 중이다.
결혼 후 아이를 낳고 다시 워킹맘으로 일은 한 적은 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전업주부로 살았다. 하지만 살림은 뒷전이었다. 나는 학창 시절의 관성대로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고 무언가를 계속 배워야만 그 불안함을 떨쳐 낼 수 있었다. 뭔가 쉼없이 바쁘게 지내서 그 꽉차고 밀도있어 보이는 공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줌으로써 나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고 이를 통해서 그나마 인간답게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이렇게 열심히 한 분야를 하다보면 뭔가는 되어 있겠지, 나의 재능을 발휘할 곳이 있으며 라고 믿으며 불과 얼마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30대의 막바지에 이른 요즘... 결혼 후 10년간,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지켜왔던 신념, 이를 위해 투자해 왔던 시간들이 흘러 지금의 어떤 모습의 나를 만든걸까... 생각보다 너무 나도 빨리 흘러버린 10년. 육아, 직장 생활 그리고 유럽 생활이 내가 이 10년 동안 보내 시간의 큰 테두리이고 그 안에서 나는 사람들을 최소한으로 만나며 외국어 공부를 취미삼아 자기계발을 해 왔다. 보통 이런 책을 내는 사람이면 그 시간들을 디딤돌 삼아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을 법도 한데.. 나는 그냥 중국어 조금 하는, 영어 조금 할 수 있는 아줌마에 지나지 않다. 나는 무얼위해 그렇게 공부에 집착한 것일까... 내가 밖으로 발산할 수 있는 에너지가 이것이 최선이었던 걸까... 그나마 이렇게라도 말할 건덕지가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만 그 시간들에 비해 내가 펼칠 수 있는 역량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다른 이들과 크게 특출나게 다르지도 않다. 그리고 나처럼 목에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이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외국어 공부라니.. 진짜 그냥 시간 보내기로 이런 취미를 가졌나 싶을 정도로 목상태가 최악으로 내리 꽂는 날은 유리 멘탈을 가진 나를 더욱더 힘들게 만든다.
하지만 스스로를 그렇게 낙인 찍기가 싫어서, 내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다하도 스스로 굳이 그렇게 비수를 박을 필요가 없는거 같아서, 그렇다고 사실이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그리고 나 아니면 비난을 하던 칭찬을 하던 나를 그렇게까지 신경쓰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마음을 고쳐먹는다. 남에게만 선량하게 하지말고 나에게도 시간을 주고 여유있게 찬찬히 뜯어보고 어루만져 보려한다. 바로 내 로망의 나라 프랑스에서...
프랑스에서 굳이 이런 생각을 하기로 작정한 건 아니었다. 마침 요즘 이런 절망스러운 어지러운 생각을 갖게 된 시기가 여름 휴가와 맞아떠어지게 되었다. 글을 쓰리라고 마음먹은 요즘 시가와 나의 마음 상태 그리고 여행이라는 이 삼요소가 결혼한 타이밍때문이라고 할까...
여행을 떠난다는건 그 장소에서 내가 익명성을 가지고 다른 시각으로 나를 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코로나 시기에 여행을 떠난다는 것 자체가 모험이긴 하지만 이 여행을 통해서 내가 나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그려낼 수 있다면 낯선 여행지에서 앞으로 내가 가져가야할 내 안의 따뜻한 친구를 만날 수 있다면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문뜩 쳐져가는 팔뚝살에 입혀가는 주름살이 그리 흉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나의 노력들과 꾸준함이 꼴배기 싫은 시간 죽이기가 아니라 아직은 열매맺지 못한 나의 미래를 위한 자양분이기를 기원하며... (그 열매는 진짜 오지 않는다. 아니면 왔는데 내가 못봤다.. 왔다가 시들었으려나...) 내가 조금더 강인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될 수만 있다면 내가 그렸던 대로 지혜와 현명함을 갖춘 어른의 모습을 그릴 수 있다면 이번 나를 데리고 하는 여행이 무엇보다도 30의 끝자락의 나에게 줄 수 있는 소중한 선물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