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라면 명품 백 하나는 있어야 할까?

이것은 명품 없는 자의 슬픈 고백

by 지안느

나에게 명품은 쿠팡템, 컬리템처럼 친숙한 아이템이 아니기 때문에 몇 가지의 장면들로 기억된다. 명품에 대해 무지했던 나에게 처음으로 명품이 인식되던 순간은 약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루이비통

첫번째 장면은 20대 중반에 참석했던 결혼식에서 마주친 60대 여성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나는 명품이라고는 샤넬, 루이비통, 구찌밖에 모르는 애송이었는데 문제의 그 여성은 누가 봐도 자신이 루이비통임을 소리 지르고 있는 루이비통 모노그램 백을 들고 있었다. 그 여성은 허리가 굽고 작은 체구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상체만한 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가방의 손잡이를 붕어빵 봉지를 쥐듯 움켜쥐고 있는 것이 처음부터 신경쓰였다.


우연히(?) 그 여성분과 같은 줄의 하객석에 앉게 되어 그 여성을 가까이 관찰할 수 있었는데, 가까이서 본 그녀의 옷은 등산복 차림이었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자꾸 큰 소리로 자신의 조카(신랑)이 얼마나 재능이 많고 똑똑했는지를 옆자리 하객(서로 초면)에게 떠들어대서 내가 다 눈치를 봐야했다.


그때 느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명품을 보지만, 결국 그 명품이 누구 손에 들려있는지를 본다는 것을. 그리고 명품을 들기 이전에 '나라는 사람 자체가 명품이 되는 것'이 더 시급한 일이라는 것을.


2. 마시모뚜띠

나는 흔히 말하는 판교 사투리를 쓰는 스타트업인이었고, 그들의 룰이 그렇듯 내 가방은 항상 백팩이었다.그래서 나의 20대 중후반은 명품과는 한참 동떨어진 삶을 보냈다. 하지만 문제는 30대가 되면서부터인데, 그놈의 '30대가 되면 명품백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말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딴거 신경 안쓴다고 하면서도, 결혼식에 참석할 때마다 중요한 가족 행사가 생길 때마다 내 마음은 자꾸 명품백 주변을 기웃거렸다.


그러다 우연히 강남 '마시모뚜띠' 매장을 오랜만에 들어갔는데 신기한 경험을 했다. 하필 그 매장은 내가 월급 80만원 받고 일하던 방송작가 시절에 자주 갔던 매장인데, 그때의 나에게 마시모뚜띠는 너무나 비싼 브랜드였다. 그래서 틈 날때마다 가서 옷을 만지작 거리고 눈에 담으면서, 30대가 되면 그때는 마시모뚜띠 옷을 척척 사입으리라! 다짐했었다.


그런데 30대가 되고 방문한 그 매장에서 옷에 붙은 가격 택들을 보는데 예전엔 그렇게 비싸게 느껴졌던 옷들이 지금은 그렇--게 비싸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물론 물가 상승의 영향도 크겠지만) 그때는 나에게 명품같던 마시모뚜띠가 SPA 브랜드처럼 여겨지는 날이 오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때 다짐했다. 나에게 지금 비싸게 느껴지는 명품들이 마시모뚜띠의 캐시미어 니트처럼 가뿐하게 느껴지는 날이 오면 그때 사야겠다고.


3.에르메스

그로부터 한동안 또 명품을 잊고 살았다. 아니 어쩌면 명품을 사치품이라 여기며 멀리했었다. 그런데 명품에 대한 경험과 생각이 완전히 바뀌게 된 계기는 남편과 떠난 유럽 여행에서였다. 명품의 고장 프랑스 파리에서 에르메스 매장을 갔는데, 그곳에서는 따라붙는 직원이 없었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마음껏 제품을 보고 만질 수 있었다. 거기에 아름다운 계단과 타일들, '마! 이게 에르메스다'라고 외치는 정갈한 가구들까지..

안데르센 동화에서나 볼 법한 뽀글 머리 소년이 에르메스 앞치마를 두르고 돌아다니면서 우리에게 오렌지 주스를 권했고, 주얼리 코너에 기웃거리는 우리에게 '너 정말 운이 좋다며' 한국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반지를 서슴없이 보여주기도 했다. (그래서 이거는 샀음)

너무 예뻤던 코트, 10년 뒤엔 내 옷장에 있어라

나는 마치 놀이동산에 온 아이처럼 시간가는 줄 모르고 매장 전 층의 모든 물건들을 보고 만졌다. 진짜 명품이라고 하는 물건들의 퀄리티와 디테일한 마감들, 그 중량과 촉감, 그들이 준비한 고객 경험까지.. 나는 명품이 품고 있고, 그들이 내뿜는 것들을 마치 현장 학습나온 학생처럼 세포에 새겨 넣었다.


4.셀린느

하지만 같은 여행에서 동시에 명품의 쓴 맛을 보기도 했다. 라파예트 백화점의 셀린느 매장에 갔는데 갖고 싶은 가방이 생겨버린 것이다. 내 손바닥만한 가방이었는데 가격은 500만원 정도였다. (200만원선에서 비슷한 다른 가방을 살 수 있었지만 내 손은 이미 이 보드라운 특별 가죽을 만져버렸다.)

지금 보면 안 사길 너무 잘했다.

앞서 에르메스 매장에서 배운 명품에 대한 생각은 온데간데 없고 '이 가방을 사?말아?' 하며 요동치는 내 마음만 있었다. 통장에 500만원 정도는 있으니까 살 수야 있겠지만 그 가방은 20대 초반에 만지작 거렸던 마시모뚜띠 캐시미어 니트만큼이나 비싸게 느껴졌다.


결국 1시간 넘게 라파예트 백화점을 빙빙 돌며 고민하다가 남편의 손에 질질 끌려나왔다. 찬 바람을 맞으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매장에서 흔들리던 내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 순간에는 내가 가방을 소유하는 게 아니라, 가방이 내 마음을 완전히 빼앗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주도성'에 대해 그렇게 집착해왔으면서, 손바닥만한 물건에 내 마음을 홀랑 내어주려 했다니, 분하면서도 안 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마저 지안스포츠..

아이러니하게도 그 날 나는 5년 넘게 쓴 쟌 스포츠 백팩을 매고 있었는데, 이제는 내 몸의 쉐입을 그대로 담고 있는 쟌스포츠 백팩을 매고 에펠탑을 보며 다짐했다. 다시는 물건에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로.


5.다시 에르메스

고백하자면 내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의 절반은 패션 인플루언서들에게 내어주고 있다. 최근에 한 인플루언서가 에르메스 아이템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했던 말이 인상적이었다.


자기는 에르메스 아이템은 한 번에 두 개 이상 착용하지 않는 게 패션의 규칙이라는 것이다. 에르메스 제품들은 제품 자체가 갖는 힘과 아우라가 있는데 그걸 두 개 이상 두르는 순간, 그 명품의 기세에 내 카리스마나 기세가 눌리는 경향이 있다고. 그래서 자기는 에르메스 백을 드는 날에는 에르메스 악세사리를 빼거나 에르메스 악세사리를 한 날에는 로고가 없는 다른 가방을 든다는 것이다.


맞다. 꼭 에르메스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명품은 그 로고만으로도 존재감을 갖는다. (우월감이나 상징성이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존재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명품을 들면 눈에 친숙한 명품에 먼저 시선이 가고, 본의 아니게 사람이 명품에 묻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결국 중요한 것은 명품의 기세에 눌리지 않는 나만의 기세와 아우라를 만드는 것. 그리고 내가 만들어낸 '사람이 명품'이라는 그 기세에 명품을 살포시 얹는 것! 아마 이게 명품백을 사는 것보다 더 오래 걸리고 어렵지 싶다.


6. 30대 중반, 현재까지의 결론(나중에 바뀔 수 있음)

현재의 나는 심심할 때마다 온갖 명품들의 웹사이트에 들어가 신제품을 살피고, 브랜드들이 새로운 시즌의 쇼를 선보일때마다 마치 출시하면 살 것처럼 맘에 드는 착장들을 캡쳐한다. 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명품 매장에 들어가서 (마치 살 것처럼) 이것저것 입어보고 만져본다. 물론 아직 내가 스스로 약속했던 명품 가격이 마시모뚜띠처럼 느껴지는 그 순간은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집으로 데려올 수는 없다.

얼마 전에 갔던 로로피아나, 물론 안(못) 삼

하지만 패션을 애정하는 사람으로서 세계에서 난다긴다하는 디자이너들이 엄청난 압박과 보상을 받으며 만들어낸 결과물들을 염탐하고, 세상 모든 이들이 명품이라고 인정하는 수준이 어디인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는 것을 놓치고 싶진 않다. 서둘러 성공하지 못한 탓에 명품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진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며, 온갖 명품을 모두 직접 경험한 후에 이야기도 쓸 수 있는 날도 어서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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