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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lfynina Oct 02. 2022

[박서보] 주장없는 수행의 예술

박서보의 작품세계 : '비움'을 통한 예술적 수양

 한국을 대표하는 단색화의 대가로 알려진 박서보. 올해로 92세가 된 그는 살아있는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변화무쌍한 21세기라지만 험난한 그의 인생 굴곡에는 비하지 못할 터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일 뿐만 아니라 황무지였던 한국의 현대미술을 비옥하게 일구어낸 장본인인 그가 이루어낸 변화의 발자취를 따라가보았다.

변화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하지만 변화하면 또한 추락한다.

 박서보가 남긴 말 중 아마 가장 유명한 말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해하기 참 어려운 모순적인 말이기도 하다.

이에 '시도해야할 변화가 있고 죽을때까지 지켜야 할 법칙이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신념은 굳건히 지키되 그 안에서 정말 다양하고 용감한 변화를 시도하는 그의 그간 행보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 나는 '왜 그림을 그리는가'하고 자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신을 위해 그림을 그린다'고 말입니다. 이제 나에게 있어서 그림은 수신을 위한 수단이며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도구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수신의 결정체일 수도 있습니다.

변화하지 않으면 추락합니다.

남의 생각에 슬쩍 끼어들거나 표절 또는 정신적 윤간을 일삼으며 변화하려 들면 더더욱 비참하게 추락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급함이나 서두름 때문에 추락이 기다린다는 것을 모르고 범합니다.

뼈를 깎는 아픔, 극기를 통해 변화하는 것을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1. 전쟁이 불러온 변화

 *박서보의 본명은 박재홍이다.

어린시절 재홍은 또래에 비해 말도 잘하고 영특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다. (더불어 그의 태몽은 아주 근사했으며 그때쯤 점쟁이마저 셋째아들이 세상에 유명한 사람이 될 것이라 말한 것도 한 몫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변호사가 되길 바랬지만 재홍은 그닥 관심이 없었다. 여리고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였던 그는 어린 나이부터 그림에 흥미를 보였다. 심지어 소질도 있어 상도 받고 동네 어른들의 화투 그림도 그려주곤 했다. 아버지는 그러한 아들의 모습이 못마땅했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는 법.

이후 결국 재홍은 홍대 미대에 진학하게 된다. 그 기쁨도 잠시. 그가 입학하고 4개월도 채 되지않아 6·25전쟁이 발발한다. 여린 청년이었던 그는 전쟁으로 인해 한순간에 거친 세상에 내놓여지게 된다. 무엇보다 전쟁은 예술가로서 도약하려는 그를 경제적 한계와 정치적 압박으로 몰아세웠다.

23세 대학시절의 박서보 (CC BY-SA 4.0)

 

재홍에서 서보로

 흔히들 호(號)하면 자기 나름대로의 이상이나 별다른 의미를 부각시켜 지은 것이 보통일 것이다. 그러나 내 경우는 좀 우습지만 다르다. 서보(栖甫)란 호(號)를 쓰게된 것은 좀 별다른 데 있었다. 지난 55년 24살 때, SO 학도 훈련을 마치고 나오자 '재홍'이란 이름이 어쩐지 갑작스레 격에 안 맞고 부르는데 힘이 드는 것 같았다. 그래서 새 출발하는 기분으로 인생에 좀 변혁을 가져오고 싶은 욕망에 무조건 이름을 버려 버렸다. 나와함께 학병을 나온 클래스메이트 이원용 군도 동감으로 이름을 버렸다. 그러나 막상 별다르게 부를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둘이 만나면 말똥말똥 얼굴만 쳐다보고 서로 이름을 부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름 없는 일주일이 지났을까. 그때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계시던 맹인제 선생님이 우리들의 기특한(?)사정을 알고는 명동 청동 다방으로 불러내어 '서보(栖甫)'와 '수간(樹幹)'이란 2개의 이름을 지어내놓고는 아무것이나 마음에 든 것을 골라보라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그 뒤로부터 서보가 된 것이다. (...)

-박서보,<<주간 한국>>, 1970년 12월 20일


작품에 담긴 전쟁 - 앵포르멜과 원형질

우리에겐 묘법, 단색화의 대가로 알려진 박서보인만큼 대체로 그의 작품은 우리로 하여금 평온한 느낌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그의 작품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초년시절의 박서보의 작품에는 전쟁의 충격과 공허함이 그대로 담겨있다. 파리의 미술주간지<<ARTS>>에서는 그의 작품을 "숨이 헐떡이는 검은빛의 살결을 그려낸 상징적 인간상"이라고 소개했다.

박서보, 회화(繪畵) No.1, 1957, 캔버스에 유채, 95x82cm, 개인 소장
박서보, <원형질 No.1-62>, 1962
대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며,
눈에 띄는 것이 아니라 화면에 내재되어 있는 것

이처럼, 구체적인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렴풋이 이 작품에서 전쟁 이후의 불안과 고독을 느낀다. 더불어 거친 붓질과 텍스처는 파괴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필자는 <회화(繪畵) No.1> 을 보고 잭슨폴록의 액션페인팅 떠오를 정도였다.

그의 친구 OOO은 박서보의 작품을 보고 "자네같은 그림 양식을 앵포르멜이라고 하네" 라며 신기해했다. 이 일을 계기로 다양한 비평가들로부터 박서보의 작품이 '한국의 앵포르멜'이라 불리었다. 처음에는 박서보 자신도 자신의 작업이 앵포르멜인 줄 알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이유를 추측해보건데 당시 그의 감정과 고민으로 나온 작품이 서양의 앵포르멜이라는 양식을 모티브로 제작된 한국의 작품으로서만 여겨지는 것이 싫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양식을 토대로 그린 작품이 아니라 스스로를 탐구하는 과정 속에서 도출된 작품이므로 이를 앵포르멜에만 국한하여 생각하는 것은 협소한 생각이다.


"어느 날 저에게 대롱대롱 매달리는 형상들을 몽땅 파괴하고 물을 부은 화면 위를 빨랫비누로 문지르고 거친 숫돌질을 하니까 속에 깔린 색깔들이 보석처럼 돋아 오르는 데 이 뜻하지 않은 것들에서 본능적인 쾌감을 맛보게 되더군요. 이것만으론 만족할 수가 없어서 뿌리고 흘리고 긁고 번지게 하는 등 아무 의미 없는 짓을 본능적으로 하다보니까 무엇이 무엇인지 통 모르겠더군요. 도시 무엇 때문에 이런 어처구니 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무척 후회도 해보았습니다. 답답하고 몸부림쳐져 대폿집에 가서 애꿎게 막걸리나 작살을 내곤 얼근히 취해  컴컴한 화실에 들어서서 불을 켜는 순간, '앗! 이것이로구나'하는 느낌이 들더군요. 이야기들이 없어진, 그리고 순수한 행위만이 있는 단순화된 세계와의 접촉에서 전 비로소 해방감을 맛보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이것이 훗날 앵포르멜이라 불린 저의 일의 시작이었습니다."

-이경성-박서보 대담, "1950년대의 한국미술",한국현대미술전집』 Vol.20, 한국일보사, 1979년

 


2. 현대 미협

 기존 한국 화단에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며 현대 미술의 시작을 알린 소모임 중 하나이다. 현대미협은 박서보를 중심으로 그의 친구들과 함께 결성되었다. 서로의 예술적 정보와 관심 등을 공유하고 전시를 같이 기획하기도 했다. 박서보는 "어느 역사로부터도 부채를 지지 않은 미술"을 해야한다고 강조하곤 했었는데 현대미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구처럼 이론이나 기존의 미술가의 양식을 토대로 작업하는 것이 아닌 자기만의 삶, 체험에 기반하여 그림 그리고자 했다. 그 과정을 곧 화가의 '자기발견'의 시간이라 여겼다.

좌로부터 하인두, 장성순, 김창열, 박서보, 전상수, 김청관


우리는 작화와 이에 따르는 회화운동에 있어서 작화정신의 과거와 변혁된 오늘의 조형이 어떻게 달라야 하느냐는 문제를 숙고함과 동시에 문화의 발전을 저지하는 뭇 봉건적 요소에 대한 '안티 테제'를 '모럴'로 삼음으로써 우리의 협회기구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우리의 출발이 두가지의 절박한 과제의 자상 밑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작품 개개가 모두 이 이념을 구현하고 현대조형을 지향하는 저 '하이브리우'의 제정신과의 교섭이 성립되었느냐에 대한 해명은 오로지 시간과 노력과 현실의 편달에 의거하리라고 믿는다.


이는 현대미협 최초의 창립전에서의 서문이다. 온화한 글 속에 그들의 가치관을 잘 녹여낸 이 글은 현대미협이 지향하는 방향이 명확히 드러난다. 단순히 회화에 대해서가 아닌 우리의 문화에 대해 고뇌하는 그들의 모습은 매우 폭넓으면서도 깊은, 당대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3. 파리에서

1961년, 파리 세계청년화가대회에 박서보가 한국 대표로 초대받는다. 집을 팔아 절반은 아내에게 쥐어주고, 그 절반을 들고 파리로 향했다. 하지만 컨퍼런스는 1년이 미뤄졌고 당시 그가 가진 돈으로 파리에서 1년을 더 머물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이번에 돌아간다면 1년 후 파리에 다시 올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때에는 국가에서 항공편을 지원해주지 않을 것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내년까지 파리에 거주하기로 한다. 방세도 못내고, 하루 한끼도 먹을까 말까하면서도 그는 계속해서 작품을 그려나간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에서는 아이가 아프다는 연락까지 받은 그는 그림을 팔고, 청소일까지 하며 파리에서 버텼다.


1등상을 수상한 <원죄>앞에서 박서보의 기념사진

 다행히도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그는 컨퍼런스에서 당당하게 1등을 차지한다. 심지어 작품을 하나만 내야되는 지 모르고 두개를 냈던 박서보는 하나는 1등상, 나머지 하나는 3등상을 받으며 그의 실력을 입증했다.



더불어 그의 수상은 개인적인 성과 뿐만 아니라, 한국화단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 역사 최초로 파리의 비엔날레에 초대받은 것이다 . 하지만 그 당시 한국은 518민주화운동이 벌어지고있었고 사실 먹고사는 문제가 급급했다. 모두가 안된다고 만류했지만 그는 한국의 화단을 알리기 위해 총대를 메고 나섰다. 심지어 국내 작가들도 그를 지지해주기보다는 반신반의하며 회의적이었으니 힘이 빠질법도 한데, 그의 주장은 확고했다.


 그의 땀과 노력이 없었다면 한국의 미술이 세계적으로 알려지는 것이 훨씬 늦어졌을거라 생각될 정도로, 우리의 미술은 박서보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계속해서 서신을 보내며 김창열과 소통하고 전시에세이를 직접써서 전달하며 바쁘고 정신없이 '파리 비엔날레 진출'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마지막에, 그의 이름은 빠져있었다.

얼마나 허탈했을지 감히 헤아릴 수 없다. 그럼에도 그때 그의 수고는 한국의 화가들과 예술을 누리고 있는 우리에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 실망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동료들을 위해 전시 서문을 신문에 기고한 박서보의 넓은 아량에서 그의 넉넉한 인품을 느낄 수 있다.

1961년 제2회 파리청년비엔날레



4. 묘법

박서보의 대표적 화풍인 '묘법'. 세계적으로 감탄을 자아낸 묘법은 그가 가족과 보내던 일상에서 탄생했다. 당시 그는 홍익대학교의 젊은 교수로서 말그대로 미술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이에 많은 학생들은 그를 따랐으며 더이상 틀에 박힌 미술교육은 안된다며 개혁에 앞장섰다. 기존의 교수들은 안정적인 자신들의 자리를 위협하는 그가 못마땅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박서보는 홍대의 교수로서 남아있을 이유를 찾지 못했으며, 결국 사표를 내고만다. 그렇게 백수가 된 그는 노자와 장자를 정독하며 수양의 시간을 갖는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둘째 아들이 형의 공책 속 각 네모 칸에 글자를 흉내내고 있는 모습을 본다. 정성스레 한 획씩 따라 새겨보지만 삐뚤빼뚤 삐져나가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연필을 휘갈겨 덮어버린다.

역시 영감은 영감을 얻기위해 고뇌하던 자에게만 보인다고 하던가.

박서보는 아들의 모습에서 '체념'의 몸짓을 느꼈다. 그리고 이를 따라 체념하고 비움을 수양하는 예술로 승화시킨다. 선을 긋는 행위를 일정하게 반복하는 과정 속에서 그는 자신을 비우고 수양하는 데 이른 것이다.

‘묘법(Ecriture) No.43-78-79-81’ 1981년, 면천에 유채와 흑연 작업, 193.5x259.5cm ⓒ박서보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나를 비워내는 수양의 과정'이다

묘법(Ecriture) No.051023, 혼합재료, 50x40cm, 2005 ⓒ박서보


수신을 위해 그림을 그리지만,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으려는 것이 제 작업이다.
나를 무화(無化)시키는 것,
금욕적으로 나를 비워낸 결과가 내 작품이다.
 ‘묘법(Ecriture) No.150906, 혼합재료, 2015 ⓒ박서보


5. 단색화

그는 서양의 모노크롬과 한국의 단색화의 차이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서양의 모노크롬은 하나의 색을 표현하며 '차가운' 느낌이 강한 반면

한국의 단색화는 겹겹이 쌓여 하나의 색이라 말할 수 없는 오묘한 빛깔을 자아낸다.

그는 '공기색', '단풍색', '홍시색' 등 우리 삶의 체험 속에 존재하는 것들로 작품 속의 색을 설명한다.

삶의 경험과 기억의 축적이 불러일으키는 색으로서, 이를 '정신적 깊이'가 있는 색이라 말한다. 박서보의 단색화에서 나오는 아우라는 일상 속 추억들로 쌓여진 것이 아닐까.


 ‘우리의 단색화는 물감을 쌓고 뜯어내고 점을 찍는 등 작가의 신체를 이용해(촉각성) 반복적인 작업(행위성)을 하고, 이를 통해 정신을 수양하고 탐구하는(정신성)의 미술이다'

-윤진섭 평론가
박서보 묘법 ‘Ecriture No.100518(2010년)’


박서보, 묘법, 2008, 한지에 혼합재료, 195X130cm.[사진 국제갤러리]


나는 관념적인 색이 아니라 자연의 색을 그대로 담았어.
단풍이 절정에 달했을 때 시간과 빛의 각도,
공기에 따라 달라지는 색을 유심히 관찰한 뒤
수없는 시행착오를 거쳐 있는 그대로의 색을 재현하는 식으로.
나는 그걸 ‘그림 속으로 색을 유인한다’고 불러.





6. '한국적인', '전통적인' 것에 대하여

박서보는 누구보다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이 현대미술의 도약을 이루고자 노력한 사람이지만

'전통'이란 이전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 오마주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예술로서 전통을 내보이는 것은 자아와의 대화를 통해 얻는 토착성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주체성과 답습은 전혀 다르다. 한국적인 것을 현명하게 고수하는 것은 새로운 시대에서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있는 작가이기에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자문하고 변화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모색하는 젊은세대> 4인전을 보고'

박서보와 김영환, 김충선, 문우식 네 명의 작품전을 보고 난 후 평론가 '한묵'이 현대공존에 기재한 글이 인상깊어 첨부한다.


나는 이 세상 모든 가시적인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의하여 존립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부딪칠 때가 많다. 들에 핀 한송이 꽃만 하더라도 대기의 압력이 아니고는 피어날 수가 없는 것이 아닐까- 외형적인 모든 존재는 ‘생명력’이 발산하는 ‘내부미의 환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우리들은 한송이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는 하나 그것을 그렇게 있게한 ‘생명력에의 느낌’을 가져볼 것을 잊어버리는 수가 많다. 우리 주변의 가시의 세계가 지니는 매혹적인 형상은 오히려 ‘생명력에의 접근’을 더디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 자신에 대한 이 같은 물음에는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그 어떤 ‘힘’에의 도전이라고 본다.

현대회화의 추상성문제/

한묵 (현대공론 1954.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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