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oolfynina Oct 27. 2022

[게르하르트 리히터] 경계를 흐리다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세계 : 다양함과 모호함. 그 안에 담긴 이야기

 예술가는 마음 속에 각인된 기억들을 작품으로서 풀어낸다. 특히 오늘 소개할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그렇다.


 리히터의 작품을 살펴보면 같은 작가의 작품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폭넓고 다채롭다. 구상과 추상, 사진과 회화까지. 그가 이토록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작품세계를 구축해오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에 앞서 그가 살아온 배경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겠다.


 리히터는 1932년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출생하여 제 2차 세계대전 전후의 독일의 상황을 어린 나이부터 몸소 체험했다. 그는 공포 속에서도 사랑하고, 꿈꾸고, 나아가고자 했다. 15세라는 이른 나이부터 예술가의 길을 걸었던 그는 고향의 미술아카데미에서 보수적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익혔으나, 현대미술에 눈을 뜨게 된 그는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전 서독으로 이주했다. 




역사가 자아낸 복잡한 가족사

 리히터를 모티브로 한 영화 <작가미상>과 도서 <한 가족의 드라마>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삶은 하나의 픽션이라 믿고 싶을 정도로 기구하며, 극단적이다. 그 중심에는 두 마리안네와 오이핑어가 있다.


Tante Marianne, 1965

첫번째 마리엔네는 그의 첫번째 아내이며, 오이핑어는 그녀의 아버지이자 리히터의 장인이다. 두번째 마리엔네는 리히터의 이모로, 위 그림에서 생후 4개월의 게르하르트 리히터를 안고있는 여성이다. 


두번째 마리엔네, 리히터의 숙모는 비극적이게도 27세에 정신병원에 갇혀 나치에게 비참한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그의 장인 오이핑어가 바로 이에 가담했던 산부인과 의사라는 사실을 후에 알게된다. 


Uncle Rudi, 1965

리히터의 삼촌인 루디. 자연스레 웃고있는 남성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가 입고있는 제복을 통해 루디 삼촌은 나치의 일원임을 짐작할 수 있다. 전쟁은 리히터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을 가해자와 피해자로 뒤섞이게 만들었다.  그는 기꺼이 자신을 '비정치적'이라고 정의했다. 이러한 잔인한 상황들 속에서 리히터는 명확한 이념의 추구보다는 끝없는 불확실성을 추구할 수 밖에 없었다.


Motor boot, 1965


또 이 그림들의 공통적인 특징 중 하나는 모호한 경계와 더불어 '무채색'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회색을 '개인적 견해가 없는 상태', '침묵'이라고 여겼다. 그는 무채색을 통해 뚜렷한 묘사보다는 중립을 유지하고자 했다.


“나는 어떤 목표도, 어떤 체계도, 어떤 경향도 추구하지 않는다. 나는 어떤 강령도, 어떤 양식도, 어떤 방향도 갖고 있지 않다 …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일관성이 없고, 충성심도 없고, 수동적이다. 나는 무규정적인 것을, 무제약적인 것을 좋아한다. 나는 끝없는 불확실성을 좋아한다.”

-1966년 게르하르트의 노트에 적힌 글




블러링에 담긴 이야기

사진과 회화의 경계를 모호하게, 리히터의 포토리얼리즘



사진기술의 등장은 당시 회화의 위치를 흔들리게 했다. 하지만 리히터는 사진을 적대시하기보다는 포용하며 사진을 기반으로한 회화작업을 진행한다. 리히터의 포토리얼리즘 작업은 사진을 따라 그린 후 붓으로 문질러 초점이 맞지 않은 것처럼 대상을 흐리게 표현한다. 



Betty, 1988


Reader, 1994


self portrait, 1996
Moritz, 2000


사진과 그림의 사이의 경계를 리히터는 자연스럽게 스머징한다. 리히터가 자신의 딸과 아내를 각각 작품화한 Betty(1988)과 Reader(1994)를 보면 사진의 정교함에 회화만이 자아낼 수있는 분위기가 담겨있다. 리히터가 사진을 기반으로 작품을 제작한 것은 "하나의 대상이 가진 재현의 가치를 파괴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더 예술적인 면을 강조하고 재현하고자"하는 시도였을 것이다.





SEASCAPE (CLOUDY), 1969


그는 풍경화에 있어서도 윤곽선을 블러링했다. 그가 이토록 흐리게 묘사하고자한 것은 크게 두가지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사진과 회화의 경계를 흐리기 위해서이다. 사진을 기반으로 한 작품인 만큼 재현에만 그치는 것은 작품에 회화의 의미를 보태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외곽선을 흐리면서 작품을 재현하는데에 그치기보다는 그저 형태감과 구도, 대상의 분위기를 통해 표현함으로써 회화의 기능을 하고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작품에 개방성, 즉 열린 결말을 부여하고자 함이다. 앞서 말한듯이, 리히터는 히틀러와 스탈린, 두개의 전체주의를 경험하면서 이데올로기를 혐오했다. "나는 스타일이 없는 것을 좋아한다. 사전, 사진, 자연, 나와 내 그림들. 왜냐하면 스타일은 폭력이고, 나는 폭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는 정치적 이데올로기 뿐만 아니라 예술에 있어서의 이데올로기 추구도 원치 않았다. 리히터의 포토리얼리즘 작품의 특성을 대표하는 블러링(Blurring), 그리고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그의 작품세계는 이러한 그의 가치관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추상회화의 영역

ABSTRACT PAINTING 780-1, 1992
Grey, 2002


리히터는 포토리얼리즘의 작품 뿐만 아니라 추상회화까지 선보였다.


그는 추상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추상화는 구상적 모형이다.

그것은 우리가 볼 수도 기술할 수도 없으나,

분명히 존재함을 알고 있는 어떤 현실을 가시화 시키기 때문이다.

... 추상회화와 더불어 우리는 그 보이지 않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직접 다가갈 수 있는 더 좋은 기회를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추상회화는 직접적인 직관성 속에서 예술의 모든 수단을 가지고 무(無)를 묘사하기 때문이다"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종종 '비싸게 팔리는 작가'로 알려져있다. 아마 그 이유는 그의 삶과 작품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 그 자체를 나타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단순히 사조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실제로 전쟁을 겪으며 모더니즘으로 부터 느낀 염증들을 작품으로 풀어내어 진정한 다원주의를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예술가에게 자신의 양식, 즉 스타일을 갖는 것은 하나의 과제처럼 여겨질 정도로 중요한 정체성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이로부터 탈피하여 특정한 장르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언어를 구사한 그의 과감함이 리히터의 명성을 만든 것이다. 리히터의 사진적 재현과 회화적 추상까지. 그 다양한 스펙트럼 속에서 그는 감히 예술계의 카멜레온이라 불릴 자격이 있다. 


아무리 다양성을 존중하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는 것 같다. SNS를 통해 언제나 타인과 연결되어 있고, 그들의 일상을 부러워하고, 흉내내기까지 한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말처럼, 어쩌면 많이 보고 느끼고 듣는 것보다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탐구하고 내면의 것들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더욱 다양함의 추구에 가까워지는 길일 수도 있겠다.



사진 : https://www.gerhard-richter.com/


매거진의 이전글 [론 뮤엑] 생생한 인물에 담긴 삶의 깊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