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사람의 현실세계관 40
강의실에는 10명 남짓의 인원이 있었다. 저마다 클라리넷을 꺼내 들고 개인연습을 하거나 담화 중이었다. 나와 입시를 준비하는 중학생 1명을 제외한 모두가 노년층이었다.
강사가 들어왔다. 새로 강좌에 등록한 사람은 나뿐이었다. 강사는 나를 제외한 다른 수강생들과는 이미 서로 구면이라 별다른 인사를 나누지 않고 바로 강의를 시작했다. 강의는 의사가 회진하듯 돌며 한 명씩 코치하는 방식이었다. 클라리넷을 조립도 할 줄 모르는 나는 멀뚱히 앉아 눈만 껌뻑이며 순서를 기다렸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나는 강사에게 당당히 영화 ‘미션’의 주제가를 연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게 뭐람.
그 곡은 클라리넷 연주곡이 아니었다. 그 곡의 제목은 ‘가브리엘의 오보에(Gabriel's Oboe)’였다. 강사는 자신의 교재를 뒤적거리더니 적혀있는 제목의 글씨를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가리키며 나에게 또박또박 말했다.
‘가. 브. 리. 엘. 의. 오. 보. 에’
제기랄.
일순간 짝사랑이 역변한 것 같은 이상한 감정이 가슴속을 깊게 파고들었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배신감도 느껴졌다.
강사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교재에 실려있는 곡이라며 클라리넷으로도 많이 연주한다고 어설프게 위로 아닌 위로를 해줬다. 당연하게도 나에겐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기왕 배우기로 한 것이라 연습도 많이 하고 강의도 열심히 들었다. 까짓 거 연주해 주지. 오늘부터 그 곡은 '가브리엘의 클라리넷'이다.
강습은 1주일에 한 번이었다. 나는 새벽 수영을 다녀온 뒤 출근할 때까지 매일 한 시간 반씩 클라리넷과 씨름을 했다.
피아노나 기타와 달리 이 녀석은 처음엔 소리조차 들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무리한 연습 탓에 아랫입술은 부르트기 시작했다. 그래도 연습했다. 녀석은 고통을 딛고 연습하는 모습이 가여웠는지 겨우 소리는 들려줬다. 하지만 소리가 나기 시작하자 이번엔 악기의 노후화가 문제였다. 너무 오랫동안 관리를 안 한 탓도 있었지만 애당초 악기의 질 자체도 대단히 낮았던 것이다. 여러모로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그렇게 두 달을 다 채워갈 때쯤엔 제법 머릿속에 있는 멜로디를 연주할 수 있게 됐다.
결국 어설프지만 그동안 나의 로망이자 목표였던 ‘가브리엘의 오보에’도 연주할 수 있었다. 처음 이곡을 연주하게 된 그날, 나는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아 한 번에 완주하는데 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웃으면 입모양이 변해서 소리가 안 났기 때문이다. 내가 그토록 선망하던 그 곡, ‘가브리엘의 클라리넷’의 완성이었다. 완주를 끝내자마자 아무도 없는 집에서 록키처럼 두 손을 치켜들며 즐거워했다.
하지만 나는 그다음 달에 들이닥칠 좌절의 환경에 대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다음 달이 되자 그 강좌는 결국 수강생 미달로 폐강되고 말았다. 정원미달이 발생할 정도로 인기가 없었던 강의였나 보다. 이제 겨우 녀석과 친해지려 하는데... 물론 소리를 낼 수 있으니 혼자서도 연습하면 된다. 하지만 의욕이 꺾여버렸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거늘.
그래서 녀석은 결국 다시금 먼지와 함께 뒹굴고 있다. 나의 ‘가브리엘의 클라리넷’도 봉인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