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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Dec 29. 2023

문화인이란

초심을 잃은 사회

21세기에 사는 현대인은 모두 문화인이라 자처해도 무리는 아니다.

국민 대다수의 학력이 높고 전문화된 사회의 인력은 여러 분야에서 특화된 일을 한다.

예전에 비해 높아진 임금은 소득에 따라 즐길 수 있는 문화의 혜택도 풍부한 세상이다.

높아진 교육 수준과 인터넷과 유튜브의 정보와 지식을 통해 현대인의 사고방식은 변화하고 있으며 삶의 질의 향상에 따라 문화 수준높아지고 있다.

기성세대 우리 아버지들은 가족을 건사하느라 자신을 위한 시간을 낼 여력이 없었고 그 당시에는 요즘처럼 풍요로운 문화의 혜택은 상상도 못 했다.

공부를 아무리 잘해도 집안 사정이 안 좋으면 대학 진학은 꿈도 못 꾸가정 형편에 따라  대학을 포기하고 취직을 했던 청춘이 대다수였다.

어렵게 장학금을 받고 어린 학생들 과외를 하며 대학 졸업을 하면 박봉에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께 생활비 보내야 하고 단칸방 월세를 내며 힘겨운 삶을 사는 것은 취직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 시절 아버지들은 신문과 독서가 교양 생활의 전부였고 TV의 단출한 공영방송은 선택이 없었던 대중문화의 창구였다. 

인터넷이 없는 시절에 두툼한 사전은 학생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고 입시학원이 대부분이었던 그때는 요즘처럼 외국어를 배우거나 자기 계발을 할 여건열약했다.

사는 게 힘겨워도 내일에 대한 희망이 있었던 부모님들은 월급을 타면 정기 적금은 하늘이 무너져도 꼬박꼬박 부었고 그렇게 만기가 된 적금을 타면 세상을 다 갖은것처럼 기쁘고 행복했다.

그나마 그때의 은행이자는 20%에 가까웠기 때문에 은행 저축이 목돈을 만들기에는 좋은 수단이었다.

아끼고 아끼며 가족을 건사하고 엄마들은 헌 옷도 수선해 입으며  가정을 꾸렸다.

월세에서 전세로 옮기고  나면 주택 자금 신청해 집 한 채 마련하는 게 인생의 목표였으며 그렇게 작은 아파트라도 장만할 즈음이면 몸이 이곳저곳 고장 나는 중년의 고개를 넘었다.

인정이 넘치던 시대에는 부조금 내야 하는 경조사는 왜 그리 많았는지 부조금 내는 것도 만만치 않은 부담이었다.

웃들과 부침개라도 나눠 먹던 따뜻한 시절에는 친목을 나누던 모임도 많았고 성당이나 교회의 행사에는 언제나 잔치국수와 돼지고기 수육을 먹을 수 있었다.

가난해도 집안 행사는 빚을 내서라도 하는 게 자식 된 도리였고 특히 장남들은 종친회  모임도 의무적으로 참석했다.

집이 좁아도 온 가족이 모여 명절 음식을 장만하는 모습이 진정한 한국의 정서였고 생일 상을 차릴 때면 옆집 이웃에 나눠주는 음식도 준비하던 사람 사는 냄새나던 시절이었다.

당시는 명절 증후군이란 말조차 없었고 시댁 일이라면 친정 식구까지 동원하는 정성도 충만했다.

요즘에 비하면 과하다고 생각할 정도의 의무와 도리가 있었던 까닭은 산업시대가 도래했지만 대가족을 주축으로 형성된 가족이라는 개념이 고착되었기 때문이며 효와 예의를 지나치게 강조했던 그 시절의 학교 교육이 큰 몫을 했다.

88 올림픽을 지나 마이카 시대에 들어서면서 자녀를 적게 낳는 사회적 분위기가 확산되었고 대가족에서 부부 중심으로 가족의 개념이 변화했다.

부모님 눈치 볼 필요가 없는 부부 위주의 생활은 곧 현대인의 일상이 되었고 부부 중심의 살림은 필요에 의한 교류만이 친목을 도모하는 관계로 변했다.

이는 영양가 없는 친분은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며 친구도 이해타산을 따져야 한다는 뜻이다.

사람, 사람과의 관계가 이렇게 계산적이 되면 당연히 인간의 정서는 각박해질 수밖에 없고 이러한 사고방식은 진행되고 쉽게 생활 패턴이 된다.

대다수의 정서가 메말라가고 우리라는 개념이 변하면서 재테크에 관심을 갖는 사회적 분위기가 한국을 휩쓸었으며  부동산 투자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농사짓다 땅 팔아 벼락부자된 졸부들이 증가하고 꼴불견 사치 행태가 90년대에 강남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사실 명품 유행의 시초가 그렇게 시작되었고 대를 이은 사치 풍조의 영향이 대한민국을 명품 공화국으로 만들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바뀌기 시작한 가족 개념은 확산되어 외형적 성장만을 추구하는 인구가 증가했고 경제적 가치가 모든 것을 대변하는 풍조가 만연했다.

즈음 고액과외가 대입 열풍에 불을 지폈서울에 있는 정기 대학에 합격한 학생도 서울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재수를 하는 학생들이 생겨 났으며  일류가 돼야만 성공한 사람이라는 그룻된 사고가 증가했다. 

석차를 높이는 입시 위주의 교육이 엄마들과  학교의 공통된 세뇌 교육이었고 석차에 따라 반 편성을 하는 학교도 생겨났다.

학생뿐만 아니라 전문직에 종사하는 재력 있는 사람들은 영어는 한 마디도 못하면서 미국 대학에 연수과정을 수료했다고 자랑을 하며 영어로 된 수료증을 사무실에 전시하는 어이없는 해프닝도 빈번했다.

바야흐로 돈이 말하는 세상이 한국에 도래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급속한 경제 성장의 후유증이라 할 수 있지만 90년대에 시작된 부정적 현상들은 혹독한 IMF 금융위기를 거치고 계속되었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고 부유층의 사치 문화가 중산층으로 번져 나갔다.

사회 각계에서 노동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일한 만큼 즐긴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당연한 노동자의 권리지만 노사분규는 연례행사가 되었으며 경제가 힘들고 소속된 회사의 경영상태가 악화돼도 자기 몫만 챙기려는  이기주의가 이곳저곳에서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우리라는 개념이 사라진 현상이 전형적인 이기주의의 실체이며 균형 없이 성장한 사회는 집단 이기주의의 물결이 넘쳤다.

시기적절하게 정치적으로  기회를 틈타 포퓰리즘 정책을 남발하 정쟁의 도구로 노동자들을 이용하는 상황 증가했으며 진정한 정치권의 의도는 알지 못한 채 대규모로 벌어지는 사회적 혼란은 더욱 큰 문제들을 양산했다.

이와 같은 부정적 변화는 경제가 급속하게 성장한 개발도상국이나라마다 정권이 바뀔 때 발생하는 민주주의의 진통이며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우려해야 할 문제는 사회적인 대규모의 혼란이 발생하면 부정적 영향이 확산고 국민 다수의 가치관이 흐려진다는 것이다.

먼저 정치권의 보수와 진보의 대립을 시초로 대중의 갈등이 시작되면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는 것이며 각계각층의 불만이 정치와  결합할 때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진다. 

이때 가난한 사람들의 손을 빌어 정쟁의 도구로 이용하면 서민들은 무작정 손을 들어준 정치권의 편에 서게 된다.

자세히 보면 결코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경제적 차별을 빌미로 국민의 정서를  대립시키는 것이며  이러한 상황이 다름 아닌 양극화이다. 

이처럼 이기주의가 유발한 문제들은 확대되어 비판의 목소리만 증폭정작 현안에 대한 방안은 찾을 수 없다.

원래 이기주의란 타협이 불가능하고 자신들의 주장만 격화되는 속성이 있으므로 그에 따라 인간의 정서도 삭막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며 메마른 정서는 곧바로 대중의 생활방식으로 나타난다.

이웃들과 함께 나누던 따스한 정은 사라지고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게 되면 자식은 부모를 보고 배우는 것이므로 불편한 백발의 노인이 전철을 타도 양보할 줄 모르고 길 가다 사람과 부딪쳐도 사과도 안 하는 자식들이 증가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어찌 보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배려 없는 환경에 노출된 자녀들이 성장면 공동체 개념은 전혀 없는 개인적 성격 때문에 직장에서도 화합을 못한.

요즘 영업장소에서 손님이 오거나 가거나 인사 한마디 없는 직원을 흔하게 볼 수 있는데 이런 원은 우리라는 개념 자체가 없고 배양된 교육이 그릇된 결실나타나는 것이다.

부모에게 배양된 사고는 행동으로 성장하는 것이므로 어른들은 젊은 사람들에게  "요즘 얘들 왜 이래!'란 말을 할 자격이 없는 것이.

세대를 떠나 이런 세태가 만연하는 까닭은 인터넷과 유튜브의 효과도 큰 몫을 하는 것이며 자기가 관심이 있는 분야에만 시간을 보내는 현대인이 많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놀면서 사회를 배워야 하는 어린 자녀들이 컴퓨터 게임을 하며 홀로 지내는 것은 교류가 없는 환경에서 성장하는 것이므로 정상적인 정서 함양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렇게 성인이 되면 자신이 좋아하는 흥미 위주의 관심사에만 시간을 보내고 편중된 뭔가에 몰두하다 보면 습관적인 취향은 조화와 균형이 없는 여건조성되는 것이며 오랜 기간 익숙해진 습관은 상에서 화합과 타협이 없는 성격으로 굳어질 수 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일하는 직장에서는 자신의 업무 외에도 서로의 화합과 의견 조율은 반드시 필요한 법인데 자신의 주장만을 일관하려는 사람은 어느 곳에서도 불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물론 전문화 시대의 특화된 업무는 전공 분야의 인재가 관련된 일을 하면 되지만 그것은 경험이 많은 전문직과 숙련직에서나 가능한 것이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일하고 이용하는 공간에서 상사의 지시와 업무의 협력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공동체의 의무를 하지 않는 사람을 받아주는 직장은 없다.

어려서부터 학업 성적을 강요하는 주입식 교육에 익숙해지면 성장하면서 일류만을 지향한 목표를 갖게 된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회에서 상위는 극소수 밖에 없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일류들 사는 사회는 결코 아니다. 

수많은 개체들이 모여 조화를 이루며 사는 공동체가 우리가 사는 세상이며 서로 다른 개성을 존중하며 융합하는 사회가 앞으로 계속 지속되어야 할 오늘이자 미래이다.

아무리 전문인력을 요구하는 능력주의의 시대이지만 혼자 살 수 없는 이 세상은 특화된 업종의 전문가라 해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질서와 예의는 어느 곳에서나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고학력  문가들이 매너리즘에 빠져 소중한 재능을 발전시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몇 년간의 경험이 쌓이면 초심을 잃고 피상적으로 일을 하는 횟수가 잦아지고 새로운 정보나 시대에 맞는 신기술을 연구하지  않는다.

높은 연봉을 받게 되면 일에 대한 흥미 보다 취미 활동에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고 골프나 레저 생활에 에너지를 쏟는다.

소믈리에 못지않은 와인 마니아가 되거나 프로 골퍼 수준의 경지에 오르는 경우를 예를 들 수 있는데 물론 업무 외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든 그건 개인의 몫이다.

그러나 와인 마니아가 되려면 그만큼 세계 각국의 와인을 마셔 봐야 하고 장기간 알코올 섭취량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시간만 나면 주말은 물론 야간에도 필드에 가게 되면 누적된 피로는 그대로 업무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당연히 항상 연구에 매진해야 하는 전문가로서의 책무를 소홀히 하게 되는 것이며 이는 개인은 물론 사회적 손실이다.

특히  R&D 지원을 받는 전문가이라면 세금을 낭비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렇게 은 연봉의 혜택으로 명품 옷을 입고 비싼 식당에 가고 골프를 즐기며 와인 맛을 즐기는 사람들은 스스로 문화인이라 자처한다.

그러나 문화인이란 값 비싼 가치를 즐기며 유행 민감한 사람을 뜻하는 게 아니라 '뛰어난 것을 판별하고 감상할 줄 아는 사람'이르는 것이다.
이는 진정한 가치를 판별하는 안목이 갖춰진 능력을 말하는 것이며 안목을 통해 즐기고 향유할 줄 아는 사람을 하는 것이다.
흔히 문화인이란 고학력 전문직종에 종사하는 전문가와 혼돈할 수 있는데 전문가는 특화된 업무를 수행하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며 모든 전문가를 문화인이라 할 수는 없다.

물론 많이 배우고 인품이 갖춰진 사람을 문화인이라 지만 학력뿐 아니라 성숙한 인격을 갖춘 사람을 문화인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 고학력자라 해서 안하무인격 성격의 소유자를 문화인이라 하지는 않는다.

문화의 사전적 의미는 자연에 인간의 인위적 작용을 통해 변화시키거나 새롭게 창조한 산물로 정의한다.
그러나 인간이 창조한 산물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하고 현재 인간의 창조한 산물들은 유한하지만 흐르는 시간과 함께 1분, 1초마다 쏟아져 나오는 유한, 무한한 산물들은 헤아리기가 불가능하다.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개념이 문화이고 역사의 변천에 따라 증가하고 사장되거나 시대적 흐름에 의해 다시 부활하는 것이 문화이다.
즉 종교, 역사, 정치, 법, 경제, 도덕, 윤리, 예술 등 인간의 모든 산물이 포함된 것이 문화라 할 수 있는데 학자들은 '인간의 생활양식'을 문화라고 축약한다.

인간의 생활양식은 시대에 따라 변천하는 것이므로 문명이 과학에 의해 진화할 때마다 발전하는 것이 문화이며 이데올로기적 사상 역시 역사에 따라 성격을 달리하는 것 또한 문화이다.
급속한 경제 성장이 인류에게 편익을 제공하고 현금을 사용하던 과거와 신용 카드가 대중화된 현대를 달라진 화폐 문화라 칭한다.
곧 대중이 어떤 유형으로든 사용하는 모든 생활 방식을 총괄해 문화라 말할 수 있으며 현대 사회의 상징적 문화는 지적이고 예술적 개념을 이르는 것이며 오늘날의 문화인이란 진정한  가치를 판별 수 있는 안목이 있고 그것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을 뜻한다.
또한 지적으로 성숙하고 교양이 있는 사람도 문화인이라 칭하는데 부정의 여지는 없다.
지적 성숙이 문화의 바탕이라면 교육은 문화인이 갖춰야 할 필수 조건이 된다.

오지에 사는 미개한 부족민을 문화인이라 부르지는 않는 이유는 원시 부족들은 학교 교육이 부재된 자연에서 생활하기 때문이며 그들은 진보한 문명을 모르고 사는 까닭도 있다.

그러나 원시 부족도 그들의 언어가 있고 부족의 규칙과 질서가 있으며 부모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식량을 채취하거나 사냥의 기술을 배우는 과정도 교육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사회의 문화는 존재하는 것이다.
다만 진보한 문명의 문화와 문자가 없는 부족의 문화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이지만 그들의 관습과 생활양식은 명백한 문화라 할 수 다.

산업 사회가 도래하면서 사회는 변화하였고 자본이 형성한 경제적 가치가 신분 제도를 무너트리기 시작하면서 귀족들이 전유물이던 고급문화(High Culture)의 한편에 대중의 희로애락을 노래하고 표현했던 대중문화가 등장한다.

과거 귀족들은 문학과 클래식 음악을 즐기며 미술 작품을 감상하고 비싼 예술품을 소장했다.

귀족이 입는 의복과 귀족이 먹는 요리도 서민의 생활과   차이가 나는 생활양식이었다.

당연히 차이가 나는 생활양식에 의해 귀족들이 누리는 문화를 고급문화(High Culture)라 그들 스스로 자위하였고 귀족들은  대중문화를 저질 문화로 폄하했다.

그러나 대중문화는 달라진 신분 계층과 자본가의 힘이 막강해지면서 인기에 영합하는 대중 예술에 힘을 실었고 흥행사라 부르던 산업 예술의 등장과 함께 대중 속으로 확산되었다.

산업화가 진행되고 가톨릭 세력의 쇠퇴에 이어 시민혁명은 노동자와 일반 시민의 권리를 신장시켰고 대중 예술은 점차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클래식과 대중예술은 높은 장벽에 막혀 구분되었고 대중 예술의 기류가 아무리 거세도 전문가들이 만든 클래식은 시대가 바뀌어도 존립했다.

근대를 지나 현대에 이르러 대중 예술은 거대한 산업으로 자리를 잡았고 대중 예술은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대중 예술도 진정한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면 외면받을 수밖에 없으며 세계인은 고전과 현대의 조화를 수용하는 문화를 누리게 되었다.

시시각각 변모하는 사회는 빠르게 유행을 만들고 쇠퇴하는 과정을 수 없이 반복하며 문화의 산물을 창조하지만 현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조화 속의 진정한 가치를 창조하는 문화를 추구하고 있다.

문화인이란 시대를 초월해 진정한 가치를 가늠하는 안목을 갖춘 사람이며 그 안목은 교육과 지식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니체는 '하루라도 자기 계발을 게을리하지 말라.'라고 강조했고 '고귀한 것은 고귀한 결과를 낳고 천한 것은 천한 결과를 낳는다.'라고 말했다.

자본주의가 경제를 만들고 아무리 돈이 말하는 세상이지만 문화의 진정한 가치는 결코 사치가 아니며 명품브랜드를 고 비싼 와인을 즐기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영웅 숭배론'을 쓴 빅토리아 시대 최고의 지성으로 불리는 토마스 칼라일의 '의상철학'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이 거리를 휩쓸고 지나가는 처지도 다르고 나이도 다른 수많은 인간의 물결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당신은 아십니까? 영원에서 와서 영원으로 갑니다.
이들은 모두 유령이요. 환영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상을 가진 영혼들이지만 곧 그것을 잃고 허공으로 사라질 존재들입니다. 그들이 걷는 단단한 길은 영상에 지나지 않고 그들은 허공의 한복판을 걷고 있습니다. 그들의 앞에도 뒤에도 있는 것이라고는 공허한 시간뿐입니다.
저기 붉고 노란 옷을 걸치고 걷는 사람, 구두 뒤꿈치에 박차를 달고 머리 꼭대기에 깃을 꽂은 채 한껏 멋을 부린 저 사람에게는 오직 오늘만 있을 뿐 어제도 내일도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친구여 여기서 당신은 모든 존재를 씨줄과 날줄로 삼아 짠, 역사라고 부르는 살아 움직이는 직물의 고리 하나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잘 보십시오. 그것은 곧 당신을 스쳐 지나갈 것이고 그리고 다시는 눈에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현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반문해 봐야 할 것이다.

지금 진정한 문화의 가치를 누리고 사는지 허영을 쫓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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