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로에 위치한 대한극장이 이제는 다시 가볼 수 없는 과거 속으로 사라진다. 1980, 90년대 대중문화의 창구인 충무로가의 극장들이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밀려났고 대한극장 역시 코로나 사태 이후 경영난이 겹치며 문을 닫게 되었다. 아날로그 시대의 대표적 아이콘이라면 FM 라디오와 베스트셀러 그리고 충무로 영화관을 꼽을 것이다. 그중 시간을 따로 내야 하는 영화는 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수고가 필요한 시대였고 그나마 운이 좋으면 원하는 시간에 영화를 볼 수 있었지만 매진이 되면 호주머니가 두둑한 사람은 기다리지 않고 암표를 샀다. 하지만 연인들은 다음 영화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지 않았고 한겨울 영하의 날씨에도 둘이 함께 한 시간은 춥지 않았다. 커피숍에 갈 여유가없어도 자판기 커피를 마시던 충무로 극장가는 낭만이 충만하던 거리였다.
사노라면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기쁨과 시련의 시간들도 지나고 나면 아련해지기 마련이지만 요즘에 비하면 모든 게 불편했던 시절에도 젊은 날의 정서는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인터넷, 유튜브가 없던 시대여서 즐길 수 있는 문화의 폭은 좁았지만 생각해 보면인터넷 시대와 비교해도 젊은 감성을 충족할 수 있는 문화의 혜택은 존재했다.
그때가 좋았던 사유라면 기다리는 여유가 있었고 급변하는 이 시대의 정보사회보다 사색하고 음미할 수 있는 문화의 가치는 깊었다. 대한극장이 문을 닫는다는 뉴스를 듣고 문득 젊은 날의 기억이 떠오르는 연유는 지난날 자주 가던 공간이 없어지는 아쉬움 보다 그 시절 극장과 함께 공유했던 추억마저 사라지듯 다가오는 애달픈 마음이 아닐까 싶다. 무엇이든 오래된 것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것이 오는 것은 섭리라 해도 변함없는 자리가 사라진다는 사실은 아직 시들지 않은 정서가 추억 속으로 묻혀버린다는 것이며 누구나 그렇듯 당연한 시대의 변화로 잊히는 것이다.
영화를 보러 긴 줄을 서서 티켓을 사던 시절에는젊음의 감성을 발산할 수 있는 공간은 드물었다. 신입생이 되면 미팅이 가장 큰 화두였으며 남학생들은 필수 코스로 당구를 배웠다. 도심 번화가에서 항상 들려오는 인기 발라드가 당시 젊은 감성을 노래했고 그때는 카페 문화가 번창해서 분위기 있는 카페가 젊음을 이어주는 정거장과 같았다. 그 시절 카페의 특징은 안락한 소파에 귀에 익은 음악이 끊이지 않았고 돈가스나 함박 스테이크, 비프가스를 먹고 나면 커피나 음료는 따로 주문할 필요가 없이 제공되는 곳이 많았다. 아날로그 시대 기성세대가 즐길 수 있는 문화의 창구는 TV와 라디오 그리고 베스트셀러 밖에 없었으나가끔 시즌별로 공연하는 세종문화 회관의 연주회를 보러 가는 날이면 마치 가족의 대소사라도 있듯 한껏 멋을 내고 베스트 드레스를 골라 입었고 남자들은 무스를 바른 머리를 손질했고 광이 반짝반짝 나는 구두를 갖춰 신었다. 공연이 끝난 광화문 일대 식당에는 공연을 본 관람객이 허기를 달랬고 정장을 갖춰 입은 손님들의 공통 주제는 공연 얘기로 식당을 채웠다. 명동성당에서 미사를 본 날은 대한극장에서 영화를 봤던 추억이 있어 필자에겐 시간이 지나도 의미 있는 공간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여자 친구와 명동에서 식사를 했는데 당시 명동은 패션 상가가 즐비했고 골목마다 좋은 식당이 많았다.
계절이 바뀌면 직장인들은 명동에서 정장을 구입했고 같이 온 가족과 큰 쇼핑백을 옆에 두고 식사를 하던 풍경이 예전 명동의 휴일 모습이며 뒷굽이 닳은 구두를 바꿀 때도 사람들은 명동을 찾았다. 가끔 꼭 봐야 할 명작이 상영될 때면 우리 가족은 명동성당에서 미사를 보고 대한극장에서 영화를 본 후 진고개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코스가 명동 나들이 일정이었다.
이젠 그 코스에서 대한극장은 사라졌지만 그 빈자리는 어떤 대상이 그 자리를 대신할지 알 수가 없다.
필자가 20대에 명보극장에 갔는데 시간 맞춰 간 영화는 매진이 됐고 하는 수 없이 다음 영화 티켓을 샀다.
배가 출출한 터라 충무로 맛집을 찾다가 갑자기 소나기가 퍼붓는 바람에 그냥 옆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오복집'이라는 그 식당엔 나이 드신 할아버지들만 계셨고 젊은 사람이라곤 나와 친구밖에 없었다.
식사하기엔 어색한 분위기였으나 거세게 비가 오는 상황이라 그냥 거기에서 저녁을 먹기로 하고 메뉴를 봤지만 황태찜과 해물파전이 전부였다.
저녁이라 술이 당기는 시간이어서 황태찜과 해물파전에 소주를 주문했다.
이어 음식이 나왔는데 황태찜과 해물파전 사이즈가 킹사이즈였고 함께 나오는 반찬들이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였다.
20대라 뭐든 많이 먹고 소화시킬 나이여서 맛있게 먹기로 하고 음식 맛을 보자 감탄이 연발되는 훌륭한 맛이었다.
사장님은 멋을 잔뜩 부린 할머니였고 모시 한복에 짙은 새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계셨다.
주위를 둘러보니 할아버지 손님들도 모두 세련된 차림에 흰 양복들을 입고 계셨고 선글라스와 백구두를 신고 계신 손님이 대부분이었다.
한여름인데 정장을 멋있게 차려입은 할아버지 한분이 다시 들어오시더니 "오늘 뭐가 좋아?" 하셨고 사장님이 추천하는 메뉴를 그냥 달라고 하셨다.
가만히 보니 메뉴에 적힌 음식을 주문하지 않고 드시고 싶은 음식을 주문해 드시고들 계셨다.
사장님은 손님들과 술을 같이 드셨고 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를 피우셨다.
술과 함께 맛있게 먹는 도중 "이거 한번 먹어봐." 하시면서 주신 음식이 맛이 너무 훌륭했고 또 다른 손님이 주문한 음식도 갖다주셨다.
만일 비가 안 왔더라면 분위기 때문에 다른 식당을 갔겠지만 친구와 여기 다시 올 것을 다짐하며 식사를 마쳤고 그 후 오복집은 2년 넘게 단골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