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세기, 지금 세계는 인류의 가장 큰 참상이 두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뉴스를 장식하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네타냐후 총리에 관한 기사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전파를 탄다. 장기전으로 돌입한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지중해 동쪽 이스라엘에도 전쟁의 비극은 벌어지고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끊이지 않는 전쟁이 기독교와 유대교의 종교 전쟁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종교의 대립은 상징적인 분열이고 실상은 국토를 놓고 길고 긴 역사를 통해 반복되었던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다.
기원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살던 유대교의믿음의 조상이자 이슬람 신앙의 초석인 아브라함이약속의 땅 가나안(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다.
그의아들 이삭이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은 후사가 되었고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이 살던 시기에 흉년이 들었다.
유대 민족은 먹고살기 위해 이집트로 건너갔으나 노예로 연명했고 아브라함의 자손과 유대 민족은 무려 400년 동안 노예로 살아야 했다. 이어 모세가 등장하고 박해받던 유대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다. 다시 가나안(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왔지만 고향 가나안에는 블렛셋(팔레스타인 민족)이 정착해 살고 있었다. 블렛셋이 정착한 가나안 땅을 모세는 되찾지 못했지만 후세인 호세아(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했고 초대 왕 사울이 이스라엘을 건국을 하게 된다. 이어 다윗 왕이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정하고 솔로몬 왕은 예루살렘 성전을 세운다. 솔로몬이 사망하자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왕국으로 분열된다. 그 후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하고 남쪽 남유다 왕국은 바빌로니아 제국에게 멸망해 남유다 왕국의 이스라엘 민족은 포로 생활을 한다. 세월이 흐른 뒤 페르시아 황제가 유대인을 해방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기원전 63년에 로마가 이스라엘을 침략해 정복한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독립전쟁을 벌여 로마에게 항전했지만 실패하고 로마는 이스라엘 모든 성전을 파괴하고 불태워 버린다. 성난 로마군의 만행으로 모든 건물과 성전은 파괴됐으나 성전 서쪽의 벽만은 파괴되지 않았다
바로 그 벽이 오늘날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성지 순례를 하는 통곡의 벽이다. 이스라엘은 서기 132년에 다시 2차 독립전쟁을 시도하지만 패배했다.
그러자 로마는 예루살렘의 흔적을 아예 없애버리기 위한 방편으로 예루살렘 도시의 이름을 바꿔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칭하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 땅에서 추방한다. 그로부터 예루살렘은 사라진 도시가 되었고 로마 제국의 땅이 되었다. 그러나 500년간 로마가 지배했던 예루살렘 은 오스만 제국이 세계로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 638년에 무슬림의 침략으로 오스만 트루크의 영토가 되었고 이후 로마와의 숱한 싸움이 있었지만 오스만 투루크는 결국 1917년까지 그 땅을 지배하면서 예루살렘 은 아랍인들이 사는 영토가 되었다.
그때부터 유대인들의 비참한 유랑의 역사는 시작된 것이다.
뿔뿔이 흩어진 유대인들은 유럽 각지와 스페인으로이주했다. 그러나 빈손으로 떠난 유대 민족이 도착한 유럽은 이방인 유대인을 향한 냉랭한 차별만 있었고 애초부터 유럽은 잘못 선택한 땅이었다. 기독교인이 전부인 유럽은 유대인을 예수를 죽인 유다의 후손이라고 증오했고 배척했으며나쁜 일이 생길 때마다 배후에 항상 유대인이 있었다고 죄를 뒤집어 씌우는 마녀사냥이 반복되었다.
심지어 유대인이 어린 아기를 잡아먹는 종족이라는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흑사병이 창궐하면 유대인이 병균을 일부러 퍼트렸다는 등의 말도 안 되는 거짓 증언으로 유대인을 유럽의 원수로 만들고 인간 이하로 취급을 했다. 유대인들을 학대하고 박해했던 시간이 계속되면서 유럽에 거주하던 유대인은 살 길을 찾아 러시아와 동유럽으로 다시 이민을 떠났고19세기 러시아와 동유럽에 거주하던 유대인은 그 수가 세계 유대인의 80%가 된다.
유대인이 유럽인들의 박해를 피해 이주한 러시아에 1881년 혁명군이 황제 알렉산드르 2세를 암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유럽뿐 아니라 러시아에서도 나쁜 일은 모두 유대인 탓으로 돌렸고 황제를 암살한 배후가 유대인이란 유언비어가 퍼지기 시작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분노한 러시아인들의 잔혹한 유대인 대학살이 모스크바에서 일어난다.
분노한 대중은 유대인의 집과 상점 등 유대인의 거주 지역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불질렀으며 심지어 갓난아기까지 잔혹하게 살해했다. 이때 일어난 포그롬(pogrom : 폭동에 의한 대규모 박해)은 40년 동안 계속되었고 러시아에서 사망한 유대인은 15만 명이 넘었다.
그리고 1894년 프랑스 파리에서 '드레퓌스 사건'이 발생한다. 그 당시 프랑스의 중요한 군사 기밀문서가 독일 대사관으로 넘어갔는데 나쁜 일은 모두 유대인이 저질렀다는 유언비어가 다시 등장했고 그 기밀문서를 독일에 전해 준 인물이 드레퓌스라는 프랑스 장교였다는 거짓 뉴스가 퍼졌다. 증거라고는 전달한 서류의 필체가 드레퓌스의 필체와 비슷하다는 것뿐이었고 공교롭게도 드레퓌스는 유대인이었다. 정확한 증거는 하나도 없는 상태로 드레퓌스는 법원에서 종신유배형을 받았고 이어 파리에서는 반유대인 시위가 확산되었으며 유대인을 죽이자는 폭동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때 이 사건을 목격한 유대인 기자 테오토르 헤르츨은 '계몽된 도시 파리에서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이렇다면 세계 어느 곳에도 유대인이 살 수 있는 땅은 없다.'라고 탄식하며 헤르츨은 시온주의(zionism)를 주도한다. 시온(zion)은 예루살렘 성지의 언덕이라는 말이며 '시온주의'는 유대의 조상이 살던 땅(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국가를 건설하자는 운동이었다. 헤르츨의 집념의 결과로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제1회 시온주의자 총회를 개최하고 유대인 부호들의 후원으로 유대민족기금(Jewish National Found)을 만든다. 그리고 당시 아랍인들이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땅을 사들이기 시작하고 유대인의 정착촌 '텔아비브'를 만든다.
팔레스타인 여러 곳에 정착촌이 늘어나기 시작하던 1914년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나치의 학살을 피해 유대인들은 유럽 각지로 흩어졌고 그중 다수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으로 몰려왔으며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수는 늘어났다.
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될 무렵 500년간 중동을 지배하던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했고 이때를 틈타 영국이 중동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1915년 영국은 후세인-맥마흔 서한을 통해 10회의 서신을 주고받으며 이슬람 통일 국가를 건설하게 도와준다는 서약을 메카의 지도자 샤리프 후세인에게 했다.
그런데 1917년에는 영국의 외무장관 벨푸어가 예루살렘에 유대인의 민족국가를 세워도 된다는 '벨푸어 선언'을 한다. 사실 벨푸어 선언은 3중 계약이자 중동 땅을 차지하기 위한 영국의 계략이었다.
영국은 벨푸어 선언을 하기 전 1916년에 영국, 러시아, 프랑스 3국이 은밀하게 피코 사이크스협정을 했다.
피코 사이크스의 협정의 내용은 영국은 요르단 해안지역과 이라크 남부, 지중해 점유권을 차지하고 프랑스는 터키 남동부, 이라크 북부, 시리아와 레바논 지역을 점유하며
러시아는 이스탄불, 터키 해엽, 아르메니아를 갖는다는 협정이다.
간교한 영국의 전략이지만 유대인과 아랍인 중에 협정은 지켜야 했고 결국 영국은 유대인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아랍의 지도자 샤리프 후세인과의 서약은 지키지 않았다.
영국이 유대인에게 밸푸어 선언의 약속을 지켰던 이유는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시온주의자를 지지했고 미국에는 각계각층에 성공한 유대인많았으며국제사회에서 미국의영향력이 가장 컸기 때문이다.
원래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유대인은 거주민의 3%였지만 점차 그 수가 늘어나 30%를 넘게 된다. 위기를 느낀 아랍인들은 1936년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은 3년이 넘게 지속됐다. 아랍인들은 영국에 2가지 사항을 요구했는데 첫째는 팔레스타인 독립이고
둘째는 유대인의 이민 금지였다. 그러자 영국은 다시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했고 이에 분괴한 시온주의자들은 영국에 테러를 감행한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한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UN에 맡기고 팔레스타인 땅에서 철수한다. 분쟁의 불씨만 남겨 놓고 꽁무니를 뺀 것이다. 그리고 UN은 투표를 통해 팔레스타인에 아랍인과 유대인의 분할을 결의한다. 국제 사회의 인정을 받은 유대인들은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한다.
그리고 냉전 시대의 열강인 미국과 러시아가 이스라엘 건국을 승인한다.
그때, 아랍의 대부격인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침공하고 곧이어 아랍 7개국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공습한다.
1차 중동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1948년부터 1949년까지의 1차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지만 영국과 프랑스, 미국과 러시아 등 열강의 이해관계 속에 얽힌 전쟁은 시간이 갈수록 반복되고 점차 확대되었다.
1차 중동 전쟁 이후 2차, 3차 전쟁에서도 승리한 이스라엘의 국토는 3배나늘어났다.
이어 이집트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4차 중동 전쟁이 일어나지만 고도로 높은 정보력을 가진 이스라엘 군은 당시 격납고가 없었던 이집트의 활주로에 정렬된 전투기 300대를 불시에 모두 폭격해버리고 이집트의 공군력을 무력화시킨다.
전투기가 없는 이집트는 전쟁에서 패하고 이스라엘이 다시 압승을 한다.
미국 지미 카터 대통령 집권 당시 전쟁이 끊이지않는 중동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1979년 카터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과 이스라엘 메네킴 배긴 총리는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수십 년간의 전쟁을 멈추자는 평화협정을 한다.
캠프 데이비드협상의 대가로 미국은 이집트 군부에 막대한 지원과 군사원조를 한다.
중동에는 평화가 올 수 았을 것이라 기대를 했지만 1981년 이집트 공식행사 사열을 하던 사다트 대통령은 행사 도중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테러로 사망한다.
중동에서처음으로 평화협정을 한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테러로 사망한 것이다.
이란 혁명 이후 반미로 돌아선 이란 호메이니 정권은 팔레스타인에게 해방을 주창하는 입장에서 당연히 이스라엘과 적국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79년 이전까지 이스라엘과 이란은 관계가 좋은 나라였다.
특히 레자 샤 팔라비에 왕정은 정통 왕조가 아닌 근대화를 위한 세속 왕정이었기 때문에 미국과 이스라엘 모두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됐으나 정통왕조가 아닌 팔라비 왕조를 반대하는 국민들이 많았다.
종교 지도자 아야톨라 후룰라 호메이니가 15년의 망명 생활을 마치고 이란으로 돌아오자 호메이니를 주축으로 1978년에 이란 혁명이 일어났고 이란은 반미로 돌아선다.
그후 이란 내에서는 피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국경 지역에서 이스라엘과 헤즈볼라, 하마스 등의 충돌이 끊이지 않는데 헤즈볼라와 하마스를 지원하는 나라가 이란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평화가 오기는 불가능한지 모른다.
요즘 연일 뉴스에서 보게 되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의 시작은 2023년 10월 7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선전포고도 없이 이스라엘에 공습을 감행하고 지상군 기습 공격도 진행된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즉각 반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4차 중동 전쟁 이후 가장 큰 규모인 이번 전쟁으로 민간인 사망자만 100명, 부상자 1,000으로 집계됐다.
이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 간의 관계가 정상화되는 것을 반대하는 견제적 목적으로 볼 수 있다.
원래 아랍 대부분 국가들은 이스라엘을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에 대한 경제, 군사적 지원을 해 왔고 특히 이란은 헤즈볼라와 하마스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입장에서는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교가 정상화되면 그동안 팔레스타인을 지원했던 사우디아라비아의 정책이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네타냐후 총리는 이번 전쟁을 계기로 헤즈볼라를 완전히 박살내고 이란의 영향력을 끝내버리자는 확고한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2024년 4월4일 새벽에 이란은 이스라엘 본토에 처음으로 드론과 미사일 공격을 감행했고 작전명은 '진실의 약속(True Promise)'이었다.
이스라엘이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의 이란 영사관에 미사일 공격을 한 것에 대한 보복 공격이었다.
이스라엘은 아직까지 대응 공격을 하지 않았지만 2024년 10월 16일 이란에 보복 공격을 할 표적을 결정했다고 이스라엘 언론을 통해 발표했다.
공격 시기는 밝히지 않았지만 다음 달 미국 대선 전으로 예상하는데 이스라엘의 공격 강도에 따라 향후 이란과의 전면전 계획도 달라질 것이다.
국제사회의 비난과 여론에도 불구하고 하마스 은신처로 예상되는 지역에 대규모 폭격을 실시하고 민간인 사상자가 속출해도 하마스를 향한 공격은계속되고 있다.
네타냐후 총리의 강경한 입장은 이스라엘 내부의 반전 시위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UN의 권고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전쟁이 일어난 바로 다음날 2023년 10월 8일 헤즈볼라는 하마스와 연대하기 위해 이스라엘 북쪽에 로켓 공격을 퍼부었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 북쪽에 살던 주민 6만 명이 다른 지역으로 대피를 했고 정부의 지원금으로 1년이 넘게 열약한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다.
사실 헤즈볼라는 이란의 혁명수비대가 1985년에 공식적으로 발족한 조직이며 레바논에서 이스라엘을 철수시키기 위한 목적이었지만궁극적인 헤즈볼라의 목적은 팔레스타인 해방이다.
지금 서방 선진국과 국제사회가 가장 우려하고 있는 것은 이란과 이스라엘의 전면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은 두 나라만의 전쟁은 결코 아니며 이스라엘의 군사력은 미국이 없으면 불가능하고 이란은 러시아의 군사지원을 받고 있다.
이스라엘의 반공망도 미국의 지원 없이는 하마스의 로켓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이지만 막강한 세계 최고의 정보력을 갖고 있으며 최첨단 공군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면 동맹국인 미국이 전쟁에 반드시 참여하게 된다.
반면 이란은 공군력은 약하지만지상군이 막강하며 최근 러시아로부터 최첨단 전투기를 지원받았다는 정보가 있다.
그러나 현재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다시 이란의 전쟁을 지원할 여력이 없는 것이란 분석이다.
결론적으로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면전은 이란 입장에선 피하는 것이 이득이지만 미국은 현재 대통령 선거를 앞에 둔 상태라 뚜렷한 중동 정책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이며 미국의 이렇다 할 압력이 없는 지금, 네타냐후 총리의 강경한 입장은 변함이 없는 상황이다.
근본적인 이스라엘 전쟁을 자세히 보면 팔레스타인 입장에서는 독립 전쟁이고 이스라엘은 시온주의가 만든 기금으로 팔레스타인 땅을 샀고 UN의 승인으로 분할을 받은 땅이다.
그리고 아랍인들은 오스만 제국 때부터 500년이나 살던 곳이며 팔레스타인 해방이 목적인 이란이 헤즈볼라와 하마스를 지원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이란은 나라마다 당위성이 명백한 명분이 있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국면에서 중동에 평화가 오기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한 바람일지 모른다.
다만 이 전쟁을 바라보는 세계의 시각은 하루빨리 끔찍한 유혈의 참상을 멈춰주기 바라는 마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