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장님께 오후 출근을 알리고 난 평소 출근보다 이르게 집을 나섰다. 평소 출근길이었으면 버스 한 번으로 끝났을 여정이 지하철로의 환승. 그리고 또 다른 호선으로의 환승. 그리고 또 한 번의 버스까지. 멀고도 먼 여정을 거쳐 무려 면접을 보러갔다.
실장님께서 무슨 일로 오후에 출근하느냐 물었으면 난 솔직히 답했을 터였다. 하지만 실장님은 묻지 않았으며 나 역시 굳이 구태여 말을 꺼내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는 않았다. 사실 나이 마흔에 신입으로 입문하는 희망은 버린 지 오래다. 그렇지만 평소 내가 눈여겨보던 곳에서 공고가 떴기에 한번 찔러나 보자는 식으로, 하지만 이것이 나의 마지막 샷이라는 약간의 비장함을 가진 화살을 날렸다. 그리고 나의 빈약한 스펙과 과한 나이에도 불과하고 잡힌 면접.
그래, 면접까지는 할 수 있지. 큰 기대 없는 심정과 약간의 희망이 섞인 채 주말 간 면접 준비를 했다. 그리고 30분 정도 미리 도착해 근처 커피숍에서 커피를 한잔하며 최종적으로 면접 준비를 대비했다. 웹툰을 보며 마음의 안정을 찾는 작업을 했달까나? 후... 이너피스... 그리고 마지막 1/3의 커피를 한입에 쭉 들이켜고 회사에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음... 퀴퀴한 인테리어. 아주 좋아. 리모델링이라고는 눈곱만치도 되지 않음이 분명한, 건물의 연식과 동일한 것 같은 회색 바닥과 빛바랜 파티션이 오히려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해줬다. 그래 이것이 잡지사지. 글은 자고로 이렇게 침침한 곳에서 써야 제맛이지! 그리고 이래야 나의 연식에 맞으며, 젊고 싱싱한 리얼 신입 사이에서 중고 신입의 장점이 조금이나마 있어 보인다 생각했다.
면접은 편집장과 수석 기자 두 분이 봤다. 둘 다 인상이 좋아 보였다. 내 지원서가 편집장님 앞에 놓이고 본격 면접이 시작됐다. 일단 나에 대한 첫인상은 나도 모른 채 좋지 않은 상태였다. 지원서에 사진도 없었을뿐더러, 자기소개 역시 성의 없어 보일 만큼 지나치게 짧았고, 나이도 많은 데다가 신입을 뽑는데 경력이라 적어넣는 패기를 보였기 때문이다.
와... 다시 생각해 보니 이런데도 면접에 불러줌이 너무 감사했다. 하지만 이는 채용사이트를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디지털 무식자의 뼈아픈 실책이자, 뭐 일부는 나의 잘못도 있음을 시인하는 바이다. 일단 실제로 잡지사에서 일한 경력이 있어 그 내용을 집어넣었더니 신입이 경력으로 바뀌었던 것. 그리고 사진은 솔직히 넣는 칸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자기소개가 짧은 건 딱히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사실 예전처럼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부터 시작하는 구구절절한 자기소개는 올드하지 않은가? 안 그런가? 요즘은 간단히 실제 지원하는 직무에 대한 경험만 간단히 쓰는 거 아니야? 아... 물론 그 부분에 대해서도 너무 간단히 쓴 건... 그래 이 부분의 잘못은 인정하겠다.
하여튼 이런 나의 성의 없고도 별 매력 없었을 지원에도 다행히 면접이라는 기회를 잡은 건 나의 이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면접을 본 잡지사가 다루는 업계의 분야에서 5년 정도 실무자로 일한 경력과 잡지사에서 일한 경력. 이 두 가지를 가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며 더구나 신입 중에는 당연히 초레어 희귀템이었을테니 말이다.
그리고 이 부실한 지원서는 전화위복이 되었으니. 내가 또 실제로 보면 그렇게 나쁘지가 않거든! 그리고 난 짧고 성의 없어 보이는 지원서와는 달리 간절함 50000% 배수의 진을 친 마흔의 중고 신입이었기 때문이다.
면접실에 나를 밀어 넣고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 말하며, 이번 7월호 신간을 보여주며 잠시 보고 있으라 말했다. 그때 난 미리 구매한 잡지를 꺼내며 1차 어필에 들어갔다. 이에 잡지를 사 온 사람은 처음이라며 놀라는 수석 기자님.
그리고 면접을 보면서 생각보다 진지하고 열정 있는 모습에 편집장님도 이력서와는 다르다며, 조금이지만 만족해 보이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내 착각일 수 있겠지만. 하여튼 이렇게 나의 부실한 지원서는 상대의 기대심리를 낮춰 별것도 아닌 내가 조금이나마 높아 보이게 만드는 상대적인 효과를 보여줬으니. 후훗. 이것이 바로 나의 기대심리 제로 베이스 전략이올시다! 무릇 진정한 전술은 아군, 나아가 나 자신까지도 속여야 하느니! 나 자신도 속은 전략은 제대로 적중했다.
마지막으로 보통 20분이면 면접이 끝나는데 40분이나 지난 시간에, 생각보다 면접이 길어졌다며 서둘러 면접을 마쳤다. 그리고 난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문을 나섰고, 문득 희망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못 먹을 감이라 생각하고 찔러나 본 건데... 이렇게 희망이 생겨나 버리다니. 사실 그들은 모든 이들에게 이렇게 희망을 심어 다른 곳에 못 가게 붙들어 두는 고단수 전문 희망고문자일까? 아니 나를 희망고문까지 하면서 붙들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나름 희망을 품고 실장님과의 1시 출근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열불 나게 돌아온 회사. 그리고 나의 희망은 크기만큼 죄책감으로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실장님은 실적이 없는 내게 힘이 돼주겠다며, 실적 하나를 챙겨주셨다. 오! 마이! 갓... 왜 하필 오늘이란 말인가. 아직 아무것도 확실시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마음껏 기뻐하지도 못하며 받는 이 불편한 선물.
주변의 부러움은 실로 뾰족한 바늘이 되어 나를 찌르고 실장님의 부드러운 눈빛과 나를 위해 애쓰는 열기가 나를 말려 죽일 것만 같았다. 아아... 왜... 하늘은 내게 이런 시련을... 단순한 희망고문이 아닌 밑바닥의 죄책감을 끄집어내 시험대에 올리는 날 이었단 말인가. 면접에서 돌아와 지하철에 내리는 순간 쏟아진 비. 당시에는 비를 맞음에도 희희낙락 뭔가 흥분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건만 그건 내게 앞으로의 시련을 예고하는 하늘의 알림이었으니.
난 그렇게 나 홀로 죄책감에 짓눌려 좌불안석의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예상과는 다르게 다음날 합격 통보를 받았다. 2차 오! 마이! 갓... 기쁨보다 죄책감과 걱정이 몰려왔다. 하지만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자, 맞아야 할 매라면 거짓 없이 빠르게 시행해야 할 터였다. 난 실장님께 전화를 드렸고 실장님은 다음날 자세히 얘기하자고 하셨다.
끝난 줄 알았던 장마는 잊은 물건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오는 건망증 환자처럼 한반도를 다시 찾았다. 버스의 창을 통해 무지막지하게 때려 붓는 빗줄기에 나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무겁게 찍어 누르는 빗줄기에 우산을 받쳐 쓰고 사무실까지 가는 길이 한 걸음 한 걸음 힘겨웠다.
"안녕하세요! 오늘 비 장난 아니네요. 완전 홀딱 젖었네요. 하하."
1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난 동료는 궂은 날씨에도 활기차게 인사를 건넸다. 난 그녀의 말에 호응하며 살짝 웃어 보였지만 먹먹한 씁쓸함에 곧 미소가 지워졌다. 환한 불빛 아래 하나둘 출근하기 시작했고, 사무실은 금세 복작거리기 시작했다. 다들 홀딱 젖은 채로 한바탕 장난스런 투정을 쏟아냈고 사무실은 창밖의 우울한 날씨와는 대조적으로 활기로 넘쳤다. 하지만 내 머리 위는 구멍이 뚫린 듯 밖과 마찬가지로 비가 쏟아지고 우울한 구름이 나를 뒤덮었다.
아침 회의가 끝나고 난 실장님을 찾았다. 실장님은 웃으며 내 얘기를 들어줬고 나의 상황을 이해해 줬다. 난 예기치 않은 좋은 기회와 선택을 받아 퇴사한다. 예전부터 눈여겨보던 회사였기에, 나의 능력으로는 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곳이기에 기쁨으로 충만해야 하건만, 이 찝찝한 죄책감에 나의 온 세포는 저릿저릿 쓰라리다.
입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퇴사란 말인가. 하필 왜 이 타이밍에 사람을 뽑는가. 난 또 그걸 알게 돼 버렸고, 어떻게 붙어버린 것이란 말인가. 그리고 왜 이리도 좋은 사람들이란 말인가... 차라리 욕을 먹었으면 미련 없이 떠나고 마음이 편했을 텐데...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했던가. 참으로 궂은 날씨와 타이밍일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