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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란란 Jun 21. 2022

난 하지부터 그렇게 우울해지더라

여름을 제일 좋아하는데도



사계절 중 여름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공감할지도 모르는데, 나는 ‘하지’ (夏至)부터 우울해지기 시작한다. 남은 날 중 오늘이 낮이 가장 긴 날이라는 것은, 이제 더 빨리 어두워질 일만 남았다는 것이고, 이게 내겐 여름의 사형선고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여름의 낭만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속에 있으면서도 나는 정작 여름을 만끽하지는 못한다. 습기 가득한 밤 9시의 한강에서 모기 뜯기며 맥주를 마시고, 퇴근 후에도 햇빛의 노란색이 내려앉은 건물을 감상하고, 저녁시간 내내 조금씩 색이 덫 대어 져가는 서쪽을 가만히 바라보고, 초당옥수수와 물렁한 복숭아를 원 없이 먹으며 여름의 과즙들을 맛보고, 물에서 헤엄치고 나와도 여전한 열기를 느끼는 그 즐거움 속에서도, 나는 내 생각보다 행복하지 않았다. 해가 짧아지고 어둠이 길어질수록, 마음 한편 이 계절의 끝에 대한 불안함도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 불안의 뿌리는 바로 이런 섣부른 단정들. 지금이 남은 1년 중 가장 행복할 시기일 거야. 다음 계절의 나는 분명 지금보다 적어도 한 단계 정도는 덜 활기찰 거야. 여름이 가버리면 나는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을 거야.


실컷 걱정해놓고서도 그토록 기다려온 여름이 가면 한동안은 또 여름이 간 것에 대해서 슬퍼한다. 다시 여름이 돌아올 때까지 어떻게 버티지? 왜 여름은 일 년에 한 번 밖에 마주할 수 없는 것일까? 구질구질하게 지나간 계절을 생각하다가 문득 바닥을 보면 노란색 나뭇잎들이 바스락 하고 밟힌다. 가을이 온 것이다. 은행잎이 초록과 노랑의 경계를 거쳐, 끝까지 물들고, 이윽고 낙하해 땅을 모두 차지할 때까지도, 나는 여름을 슬퍼하느라 가을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제서야 내가 진작 반기지 못한 계절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완전히 차갑지만은 않은 바람, 유독 잘 맡아지는 가을 냄새, 트렌치코트와 라이더자켓을 야무지게 꺼내 입어 신난 사람들 같은 것들. 가을이 갈 때쯤에야 비로소 ‘여름이 간 게’ 아니고 ‘가을이 왔다’는 걸 깨닫는다. 바보처럼!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가을을 즐겼다... 고 말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미련 가득한 나는 또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아참참, 나 가을도 좋아했는데. 여름 아쉬워한다고 가을을 못 즐겼네. 근데 이제 가을 끝이잖아? 곧 겨울이 오겠네... 그럼 나무도 다 휑해지고 외투도 두꺼워지고 해도 짧아지고... 이렇게, 계절을 반기고 보낼 때마다 앞으로 더 불행해질 나에 대해 미리미리 걱정하고, 우울해하는 걸 무한 반복.



그러니까 대충 표로 그려보면 이런 모양새다. 내가 계절을 온전히 사랑하는 시간은 12개월 중 단 두 달뿐 인 것이다. 나머지 10개월은 지금이 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여름이 가면 기다려야 할 여름 나머지의 시간들이 싫어) , 이미 지나간 시간을 아쉬워하고 (가을을 제대로 반기지도 못했는데 벌써 갈 때가 되다니), 다가올 순간들을 미워하는데 (겨울 극혐) 쓰는 것이다. 많고 많은 계절의 순간 중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건 고작 1/6 뿐이라니. 억울했다. 그러다가 문득 내 머리를 때리는 자아성찰. 아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지. 현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사람. 행복보다 불안으로 더 많이 채워져 있는 사람.


가령 이런 것. 나는 월요일에 출근하면서 기분이 좋아도 (오늘 왠지 상쾌하고 하나도 피곤하지 않아. 아침에 지하철에 자리가 나서 바로 앉았고 독서하고 있는 책도 재미있는걸?) , 그래 봤자 오늘이 월요일이고 앞으로 4일 더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굳이 상기시키며 그 기쁨의 상태를 애써 망치는 신기한 재주가 있다. 행복해! 근데 월요일이잖아… 하고, 아직 마주치지 않은, 그러나 마주칠 게 분명(하다고 지레짐작하는)한 피곤을 미리 생각하느라 월요일 아침의 행복을 굳이 거부한다. 몇 년 전, 정말 원하는 회사의 인턴을 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6개월 내내, 이 회사의 일원이라는 뿌듯함과 자부심보다도 이 이후의 내 행보에 대한 걱정과 불안함이 더 컸다. 내가 여기에서 일하다니 꿈만 같아!… 그런데 어차피 내가 이런 곳에 정직원으로 들어올 수는 없겠지. 지원해봤자 다 쟁쟁한 상대들일 텐데. 이거 끝나면 뭐해야 되지? 그래. 늘 다가오지 않은 시기에 대한 불안으로 정작 ‘지금 이 순간’ 행복하고 안정적인 나를 갉아먹었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상태의 나였는데도 그를 즐기지 못했다. 원래 이런 인간이었으니, 그토록 기다려온 계절의 절정에서 굳이 끝을 생각하며 내 행복을 망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나의 이런 계절관(?)은 내 인생과 상당히 닮아있었단 거다. 큰 의미에서도 그랬다. 나는 여름 가는 것과 비슷하게 20대가 가는 것을 우울해했으니까. 아직 어린 나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매년 한 살 한 살 먹는 게 미치도록 싫었던 건 모두가 입을 모아 인생의 전성기라고 인정해주는 순간이 끝나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였다. 나이를 먹으며 ‘성장’하는 게 아니라, 내 가장 빛나는 시기의 끝을 향해 전력질주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20대에만 행복할 수 있고, 20대에만 도전할 수 있고, 20대만이 나의 가장 좋은 시절이라고 믿었다. 오직 여름에만 내가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처럼 말이다. 20대의 해가 가장 길 거고, 이 순간이 지나면 해는 점점 짧아지기만 할 거고... 이건 곧 내 인생에 대한 사형선고인 것 같고…


그 특정 생애주기를 너무나 과대평가한 나머지 앞으로 펼쳐질 나이의 행복은 보잘것없고 심지어는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평가절하해버렸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20대를 온전히 즐기지 못했었던 것 같다. 나이 먹는 게 너무 싫고 커져만가는 숫자에 책임을 지는 게 두려우며 더 이상은 미성숙한 게 이해받지 못하는 게 무서워. 이런 생각으로 나를 채우느라고.


그런데 사실 각각의 계절에는 각각의 좋은 점이 있기 마련이다. 봄에는 반쯤 들떠있는 사람들이 내뿜는 몽글몽글한 공기가 있고, 가을에는 온통 그러데이션 되어 어떤 색이라 확실히 말할 수 없는 풍경이 있고, 겨울에는 가슴속 3천 원을 품고 다니며 우연한 만남을 기대하는 설렘이 있다. 여름에는 다른 계절엔 백 퍼센트 천 퍼센트로 지금보다 행복하지 않을 거라 확신했는데, 막상 그 계절이 오면 나는 반드시 그 계절의 좋은 점을 발견하고 행복해지고야 마는 것이다. 그리고 뒤늦은 생각. 나, 이 계절 좋아했네? 봄가을 겨울에도 난 행복할 수 있네? 막상 여름의 나와 여름 나머지 나의 행복의 빈도나 농도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루하루도, 나이 먹는 것도, 결국은 인생도 계절을 겪는 것과 비슷한 형태일 것이다. 오늘이 월요일이라 앞으로 4일이나 더 출근해야 할지라도 그 4일 동안 행복한 일은 분명히 있을 테고, 젊음이 조금은 옅어진 3040대의 행복도 그리 과소평가할만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행복하면 그냥 행복한 채로 두자. 이 행복이 지나간 뒤를 굳이 상상하며 망치는 짓도 하지 말고, 오로지 이 순간만이 내 계절의 전성기라고 맹신하지 말자. 여름의 내가 가장 행복할 것이라고 섣불리 단정해버리는 건 가을과 겨울의 나에게 너무나 미안한 일이 아닌가. 그 단정 때문에 매번 흘러가는 시간을 두려워해야 하는 여름의 나에게도 마찬가지고. 행복은 마치 보물찾기 같은 것이라, 모든 시기에 흩뿌려져 있다. 특별 출몰 시기가 있는 게 아니고.


계절은 다시 온다. 조금 기다리고 견뎌야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계절은 9개월을 주기로 다시 찾아온다. 마찬가지로, 20대에 지나간 여름은 30대에, 50대에 다시 올 수도 있겠지. 월요일에 마주했던 여름이 화요일에 또 올 수도 있겠고. 돌고 돌아 반드시 돌아오는 것이 잠시 떠난다고 해서 힘써서 슬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자연의 섭리에까지 마음을 쓰기에는 세상에 마음 써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으니까.


그래서, 앞으로는 모든 계절을 3개월씩 공평하게 사랑해보려고 한다. 지나간 계절에 대해 미련 뚝뚝 떨어지게  지내? 언제 만나?라고 묻지 않을 거다. 어차피 계절은  오니까. 그리고  계절이 지나도 나는 나대로 행복할 것을 아니까. 여전히 가장 좋아하는 계절을 물으면 여름이라고 답하겠지만, 그렇다고 여름이 가는  두려워하면서  여름을 망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이상 여름이 가는  그렇게 슬프지 않을 때까지, 열심히 봄가을 겨울을 사랑해야지.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나이를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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