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훈 <내가 한 말을 내가 오해하지 않기로 함>
그의 결혼 소식을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감정은 배신감이었다. 그를 그저 화면 너머로만 보았던 내가 쓰기에는 조금 웃긴 표현일지도 모르겠지만.
친구들에게 이런 마음을 말하면 그들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답하거나 어이없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웃거나 놀란 말투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너 진짜 문상훈 좋아했구나. 물론 그를 좋아하는 것은 맞았지만, EXO 멤버의 열애설을 듣고 복도 바닥에 주저앉아 울던 고등학생 1학년의 마음과 같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 그 마음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동질감이었다. 나는 그가 개그 콘텐츠가 아닌 다른 영상에서 보여주는 모습에서 이따금씩 나를 보았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르고 고른 시집을 선물할 때나, 면전에 대고 말하기에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진심만 골라내어 쓴 편지를 담담하게 소리 내어 읽어주는 모습 같은 것에서. 그의 외로움, 타인을 사랑하는 만큼 자신을 사랑하는 데는 끝내 실패한 마음, 심연까지 자신을 미워해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그늘을 보면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만큼이나 당신도 외롭고 깊은 사람이군요. 그의 영상을 유독 좋아했던 건 이런 동질감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그가 결혼이라니! 아직까지 ‘결혼'이 그리 가까운 영역은 아닌 내게, 결혼은 다음 같은 단어와 맞닿아있다. 안정감, 정상성, 현실, 함께. 그러니까 내가 그에게서 느낀 ‘고독'이나 ‘외로움’ 같은 단어와는 거리가 아주 아-주 먼 것이었다, 결혼은.
당신도 나랑 같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결혼을 하다니! 어떻게 혼자서만 쏙 안정의 세계로 가버릴 수가 있어? 날 두고!
같이 배 곪으며 예술의 꿈을 꾸었던 오랜 동료가 갑자기 큰돈을 벌어야겠다며 나와는 한 마디 상의도 없이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정해 하루아침에 작업실을 박차고 떠나버려 남겨져버린 이도 이런 마음이었겠지. 그 후로 그의 영상을 잘 보게 되지 않은 것도, 이제 그는 더 이상 나와 닮은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더 이상 문상훈은 이전처럼 깊이 청승맞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밤을 향유하거나 혼자서 주머니 속 돌멩이를 만지작 거리는 일도 없을 것이고, 그러면 내가 공감했던 그의 감성과 생각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거야. 나는 마음대로 이렇게 결론지어 버렸다. 그러니까 나는 청승맞고 외롭고 우울하고 고독해야만 그런 감성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문상훈도 언제까지고 외롭고 우울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의 글을 읽었다. 그래 내가 문상훈을 이래서 좋아했었지, 이런 표현을 써내는 사람이라서. 그렇게 생각하다가 이내 몇 장 넘기지 못하고 덮어버렸는데 그에게 너무 미안했기 때문이다. 내가 감히 이런 사람에게 '언제까지고 외롭고 우울해달라'는 생각을 하다니. 그는 내 생각보다도, 그리고 당연히 나보다도, 훨씬 더 깊은 사람이었다. 내가 감히 동질감이나 공감, 감성 따위를 언급한 것이 부끄러워질 만큼. 정말 감히. 나는 영상 속 문상훈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영상에는 문상훈의 10%만이 담겨있다. 그 얘기는 나의 100%가, 200%가 곧 문상훈의 10% 언저리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글에는 훨씬 더 깊은, 어림잡아 70% 깊이의 문상훈이 있었다. (예상컨대 문상훈이 백 번은 넘게 고민하고 망설이다가 끝내는 원고에서 지워버린 글도 있을 것이기에) 이리도 깊은 사람에게 감히 나와 '같이' 외로운 사람이 되자, '평생 청승맞아 주었으면'하는 마음을 품었다니. 미쳤구나.
그는 얼마나 깊은 사람일까. 대체 수심이 몇 백, 아니 몇 천 미터 이길래, 시인에게 죄송해하는 것조차 죄송해하며, 시를 쓰는 이들이 바빠서 못하는 것들을 나눠서 해주고 싶다고 생각하고, 너는 나를 쉽게 잊어주었으면 좋겠지만 나는 너를 그 누구보다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걸까. 책을 읽으며 나는 그에게 동질감보다는 애틋함을 느끼게 되었고, 그가 시인에게 죄송해하듯 나 또한 그에게 죄송해했다. 그가 쓰는 문장을 단번에 이해하면서도 나는 절대 이런 문장을 쓸 수 없을 걸 알기에 좌절하고, 내가 지금은 알지 못하는 또는 평생 동안에도 모를 것 같은 마음을 보면서 다시 또 감히 미안해지고, 울렁거리고, 책장을 덮을 때에는 이제 그가 짝사랑을 하지 않아도 되어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이제 더 이상 그의 결혼에 배신감을 운운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가 지금보다 훨씬 더 외롭지 않은 식으로만 세상을 사랑한다고 해도 실망하지 않을 테다. 지금보다 더 외롭지 않다고 하더라도, 문상훈은 계속해서 그의 결핍에게 편지를 쓰는 사람일 것임을 이제는 안다. 내가 사랑하는 그의 글과 생각과 마음은, 2020년대의 그가 아니라 6년 남짓한 교복시절의 소년 문상훈에게서 온 것이니까. 그가 더 이상 외롭지 않다고 하더라도 큰 성장통을 앓았던 소년 문상훈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거면 됐다.
책을 읽기 이전에는 지금, 바로 이 순간에 모퉁이에 서 있는 것 (ing) 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결혼은, 왠지 그가 더 이상 모퉁이가 아닌 곳으로 떠나버린 것 같아 슬펐다. 하지만 이제는 '진짜'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안다. 중요한 건 이 순간의 위치 따위가 아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그가 모퉁이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위치는 변해도 그가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 나는 진심으로 그가 더 이상 외롭지 않기를 바란다. 그만 깊기를 바란다. 설령 그가 글을 쓸 수 없어지더라도.
문상훈, <내가 한 말을 내가 오해하지 않기로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