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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란란 Sep 21. 2024

20대 후반에서야 처음으로 ‘짝’ 사랑한다는 마음은

한참은 늦은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는다는 것


어느 초 봄 청계천 앞에서, 누군가 나에게 물은 적이 있다. 란란은 관심 있는 사람이 있을 때 어떻게 다가가?  나는 5분 정도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저는 누구를 먼저 좋아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요.


나 김란란, 여중여고여초과, 덕질경력 약 15년, 아이돌, 배우, 드라마 캐릭터, 2D까지 숨 쉬듯 무언가 (그게 비록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일지라도) 에게 크게 애정을 쏟아온 사람.


그러니까 연애와는 다른 류의 사랑에 익숙해진 덕후는 주변 이성이나 연애 자체에 관심을 크게 가져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나와 같은 성향의 친구들이 하나둘씩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며 참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건만.. 나의 사랑의 총량은 모두 덕질에만 몰빵 된 것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 때쯤, 드디어 2n 년만에 처음으로 나의 주변 누군가를 무려 짝사랑하게 되었다.



짝사랑의 생애주기



자각

그냥 같이 있으면 재미있어서 좋은 건가?

인간적인 호감일 뿐인가?

보통 이 정도면 다른 사람들은 좋아한다고 느끼는 걸까?


다른 사람들은 20대 초반에 진작 끝냈을 고민을 하다가 비로소 ‘아, 나 이 사람 좋아하는구나…’ 자각하게 된 것은 신경 쓰인다고 생각하고 나서부터 무려 한 달이 지난 뒤였다. 그의 이런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골몰하기를 며칠, 밤까지 생각하고 자니까 자연스레 아침에 가장 먼저 그가 생각나서, 정말 하루종일 머리에 그가 꽉 차 있던 어느 날.


예상치 못하게 그의 실물과 5초 정도 마주쳐버린 것이다.


아니, 내 머릿속에만 있던 사람이 왜 눈앞에? 마주치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진짜 마주칠 줄이야! 너무 뻔한 말이라 이렇게 표현하기 싫지만, 정말로 심장이 바깥으로 튀어나올  같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서, 잠시 화장실에 가서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제야 인정할 수 있었다.


그래, 이건 관심도 호감도 넘어선, 좋아하는 마음이구나.


재미

처음에는 이런 감정이 재미있었다. 도파민이 팡팡 나오기도 했고, 지금까지는 안 하던 짓을 하던 나를 보는 게 웃겼으니까.


그와 했던 카톡을 몇 번이고 돌려본다든가 (비행기모드는 필수!), 평생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연애 유튜버들의 영상 (예를 들면 ‘남자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라든가 ‘무조건 먹히는 플러팅 방법' 같은 제목이 붙은)을 정주행 하고, 심지어는 연락 오는 주파수까지 틀어놓고 자면서… (^^;;) 처음 느껴보는 이 감정을 마음껏 즐겼다. 이래서 짝사랑 중독이 생기는 거구나. 사실 창작자로서는 반기지 않을 수 없는 감정이었다. 네가 나에게 이렇게 영감이 되어주는구나! 마음껏 이용해 주마~ 우하하!


재수 없음

그렇게 ‘아.. 너무 재밌다'를 내뱉으며 혼자 피식피식 웃기를 몇 주, 갑자기 그를 생각하면 재수가 없었다.


아니.. ㅋ 니가 뭔데 날 안 좋아해?


짝사랑하는 상대가 나를 좋아하기 시작하면 갑자기 그가 더 이상 좋아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그 이유는 자존감이 낮아서라고 한다. 내가 생각하는 완벽한 그는 절대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는데, 나를 좋아한다 = 그의 취향이 이상하다 = 가치가 떨어진다.라는 메커니즘 이라는데… 이런 맥락으로 생각한다면, ‘재수 없음'을 느끼는 건 그 반대의 이유 때문이지 않을까? 즉 나는 나를 너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괜찮은데 왜 날 안 좋아해!?

이렇게 연락 안 할 거면 헷갈리게 그딴 행동은 왜 해? 미친 거 아니야?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안 다가온다고?

내가 아무리 너를 좋아해도 내가 더 아까워!!



심란과 우울

그래, 재수 없음까지는 괜찮았다. 어느 정도 내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는 수준이었는데… 그게 한 달이 되고 두 달이 되니,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일상이 잔잔하게 우울했다. 일하다가도 친구들을 만나다가도 ‘에휴…ㅠ' 한숨을 내뱉게 되었다. 그때 그 행동은 아무 의미 없이 했던 건가? 또 내가 먼저 연락을 해야 하나? 이 사람도 나만큼 내 생각을 할까? 걘 대체 무슨 마음에서 그런 말, 그런 행동을 한 걸까? 잡념을 없애려 일부러 미친 듯이 러닝을 했건만, 달리는 동안에도 그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답답함을 해소하는 관종의 방법,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물어본다. 대체 이 행동은 뭐라고 생각해요? 마음에 아주아주 큰 애물단지처럼 남아있어 도저히 말하지 않고는 이 마음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이때부터는 주변사람에게 미친 듯이 말하기 시작했다. 친한 친구는 물론이고 직장 동료에게, 별로 친밀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도파민 제공용 가십으로, 심지어는 택시아저씨에게까지… 말한 사람만 해도 한 학급정도는 될 것이다.


심지어 이렇게 글까지 쓰고 당신은 이걸 읽고 있으니, 이 짝사랑 이야기의 청자는 무한대로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결심


2달을 헷갈리다가 내린 나의 결론,


그래. 접자.


이 사람은 사귀어도 문제다.

마음을 정리해야겠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가장 최근에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은 사람으로서 감히 말해보자면, 누군가 나를 헷갈리게 할 때는 ‘이게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있는 행동이야?’로 접근하면 안 된다. 성향에 따라서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대신 이렇게 접근해야 한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딴 식으로   있어?’


이렇게 스스럼없이 나를 대할 수 있나?

=> 없다.


이렇게까지 연락을 안 할 수가 있나?

=> 없다!!


연락할 때 이렇게 싹수없을 수가 있나?

=> 없다!!!!


나에게 어느 정도의 관심은 있었을지언정 딱 그 정도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래놓고서 이렇게 헷갈리는 스킨십을 하다니…. 재수 없는 놈)


그래, 그럼 내가 그냥 정리를 하자.

근데 어떻게 정리하지? 두 가지 루트가 있을 것이다.


1, 그냥 몰래 접는다.

원래 짝사랑은 혼자 착각하고 혼자 사랑하고 혼자 이별하는 것이라고 하니까.


2,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냥 표현하고 접는다.


A님과의 심도 있는 토크를 거친 후, 1번 루트로 확고히 정했다. 그렇게 홀로 결심을 했는데…! 결심했다고 끊어질 거였으면 이렇게 글까지 쓰고 있지도 않았겠지. 그냥 4번_심란과 우울 상태만 유지될 뿐 도저히 정리가 안 되는 거다. 아… 사실상 방법은 하나구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표현하는 것. 그래서 미련을 싹 없애버리는 것.


나는 그런 사람이다. 막상 연락을 기다리면서는 그의 프사를 몇 번이나 확인하고 흔적을 염탐하면서 ‘연락이 온다… 연락이 온다….’ 주문을 외우고 종일 그 생각만 하는데, 그냥 눈 딱 감고 만나자고 연락하고 나서는 오히려 그에 대한 생각이 싹 없어지는 타입. 같은 맥락으로, 일단 말하고 나면 훌훌 털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지난 행동으로 미루어봤을 때 그에게서 긍정적인 답이 나올 확률이 1%도 안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마음을 끊으려면 표현하는 길 밖에 없다. 답을 알면서도 말해야만 끝이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가오는 만남에 이렇게 말해보려 한다.


  어떻게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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