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비가 많이 오던 출근길 아침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회사로 향하는 발걸음을 뗀 순간 샌들 끈이 툭 끊어졌다.
버스 정류장에서 회사까지는 200여 미터.
샌들을 질질 끌면서라도 가보려고 했는데 몇 걸음조차 걷기 힘들었다.
택시를 타기에는 너무 가까운 거리였고, 탄다 해도 건물 앞에 내려 사무실까지 가는 것도 힘들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친한 동료에게 전화해서 사무실용 슬리퍼를 가져달라고 부탁했고, 그 슬리퍼를 신고 무사히 출근했다.
그러고 보니 몇 주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친구와 함께 걷는 중에 샌들 굽이 떨어져 나갔다.
다행히 굽만 떨어져 나가 걸을 수는 있어서 가까운 구둣방에서 수리해서 신었었다.
연달아 2개의 샌들이 망가진 경험을 하니 또 비슷한 일이 생길까 봐 굽을 수리한 샌들을 살펴봤다. 발바닥면이 많이 낡고, 벗겨져 있었다.
그걸 본 순간 깨달았다.
나의 부주의로 샌들 끈이 끊어지고, 구두 굽이 빠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수명을 다한 샌들들이 각기 다른 형태로 망가졌던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웬만해서는 샌들을 포함한 구두들을 버리지 않았다.
샌들이나 구두 가죽이 찢어지거나 못 봐줄 정도가 않은 이상 계속 신었고, 그게 알뜰한 소비의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이런 일을 연속으로 겪으니 그건 알뜰한 소비의 미덕이 아닌 추가 소비를 부르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내가 낡은 샌들들을 미리 버렸다면 비 오는 날 동료에게 슬리퍼를 가져다 달라는 민폐를 끼치지 않았으며 그 보답으로 커피를 사지 않아도 됐고, 굽 수리비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수명이 다하기 전에 버리고 새 샌들을 샀다면 안 했을 지출들이었다.
그리고 샌들 굽이 떨어져 나가기 전과 샌들 끈이 끊어지기 전 분명히 걸을 때 흔들거나 헐거움이 있었을 텐데 너무 무심해서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의 불찰이 컸다.
그러고 보니 수명은 비단 생물이나 물건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관계에도 수명이 존재한다. 그런데 생물, 물건의 수명과 인간관계의 수명에는 매우 큰 차이점이 하나 있다. 그 수명이 얼마가 될지 예상할 수 없다는 점이다.
평생 함께 할 것을 약속한 부부가 하루아침에 남이 되기도 하며 우연히 알게 된 지인이 평생 친구가 되기도 한다.
친구나 연인, 부부 사이는 어느 날 갑자기 크게 싸워서 수명이 끊어지기도 하지만 시나브로 생긴 작은 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끊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 그 틈은 둘 사이의 마음이 조금씩 멀어져서 생기기도 하지만 관계를 끊어야 하는 신호가 분명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끊지 못해서 생기기도 한다. 그 이유로는 신호를 봤지만 못 본 척하거나 내가 잘 못 봤을 거라는 믿음 또는 신호를 보지 못해서 등이 있다.
샌들 끈이 끊어지기 전의 신호를 못 본 건 잠깐의 불편함과 작은 비용으로 해결이 가능했지만 인간관계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작게는 감수할 수 있는 금전적 손해나 스트레스 정도이지만 심한 경우에는 전 재산을 잃거나 정신적인 문제가 생길 수 있으며 최악의 경우 생명을 위협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상대의 부정적인 신호를 봤을 때 빠른 시일 내에 결정을 해야 한다.
그 신호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신호인지 아닌지를 판단해 감당할 수 없다면 과감하게 인연을 끊는 게 맞다.
예를 들면, 평소에는 괜찮은데 가끔 무례하게 구는 친구가 있다. 자주 그러는 것도 아니고 다른 부분들은 잘 맞는다면 고민이 될 것이다. 그 친구가 무례할 때 내가 그 무례함에 잘 대응할 수 있다면 친구로 두고, 혼자 계속 스트레스를 받는다며 그 인연은 끊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확실하고 부정적인 신호는 도덕적 선이 낮다는 신호이다.
여기서 말하는 도덕적 선이란 법규를 잘 지키고, 길가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다던가 하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시기, 질투가 너무 심하거나 바람을 피운다거나 폭언, 폭력성, 잦은 거짓말 등을 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렇게 부정적인 신호를 주는 사람은 친구나 연인, 지인으로도 두지 않는 것이 좋다.
이런 사람들의 가장 큰 공통점은 매우 이기적이라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의 입장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편함이 있어도 법규를 지키며 아무리 화가 나도 폭력을 저지르기보다는 대화로 해결하거나 참는다. 그리고 연인이나 배우자가 있을 때 이성에게 호감을 자제하며 호감을 넘어섰다면 정리한 후 그 사람을 만난다.
또한 시기나 질투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지만 그 상대를 해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도덕적 선이 낮은 사람은 자신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방해가 된다면 누구에게나 해를 끼칠 수 있고, 그 대상이 내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처음부터 이런 신호를 보내는 게 아니라 가까워졌을 때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주위 누군가에게 갑자기 께름칙함을 느끼고, 갸우뚱하게 하는 신호를 연속적으로 보게 된다면 그 관계는 재고해봐야 한다. 그리고 관계를 끊기로 했다면 자연스럽게 끊어내는 것이 좋다.
반드시 끊어야 하는 관계인 걸 알았는데도 하나밖에 없는 친구라서 또는 내가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어서 끊을 수 없다면 한 가지만 생각하고 끊어내야 한다. 세상에 나만큼 소중한 존재는 없으며 그 관계로 의해 나의 존재가 붕괴되거나 사라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