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꼬물젤리 Aug 08. 2023

고속열차로 케이블카 타러-방학마지막 날 번개여행

여섯 살 미남이

어린이집 방학 마지막 날이다.

지하철 타고 싶다는 미남이와 네 살 이후 두 번째 지하철 체험에 나서기로 했다.


일찍 집을 나섰다.

급한 일이 있어 은행에 들렀다. 창구에 앉아 일을 보는데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미남이가 망을 보는 아기 미어켓처럼 창구직원을 향해 고개를 쭉 내민다.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미남이를 앉혔더니 저도 본인 이름나온 통장을 한 개 만들어 달란다.

요즘 통장 개설하기가 쉽지 않다.

창구 직원이 필요한 서류가 적힌 작은 쪽지를 미남이에게 건네며 엄마에게 전해드리고 통장 만들러 오라고 한다.

받은 쪽지를 꼭 쥔 주먹이 참 앙증맞다.


은행을 나오는데  입구 ATM이 보인다.

통장을 미남이에게 건넸다.

통장을 기계에 넣고 돈을 찾는 과정을 차려 차례 일러준다.

비밀번호 네 자리도 순서대로 알려준다.

굳이 현금이 필요치 않아 출금기 최저 금액  삼만 원을 검지로 꾹  누르게 하고 다음 과정도 마무리한다.

칙칙칙.....,

단 석장인데 현금 세는 소리가 나름 요란하다.

통장을 받고 현금 삼만 원을 꺼냈다.

지하철에 앞서 뜻하지 않게 체험 한가지를 먼저 하게됐다.

우리 미남이는 뭐든 잘한다며 우쭈쭈 치켜준다.

"미남아, 비밀번호는 아무한테도 안 가르쳐 주는 건데 특별히 미남이에게만 알려준 거야. 이모도 몰라"

옹골찬 표정이 된 미남이. 어깨에 조금 힘이 들어간 듯도 하다.

지하철 역으로 갔다.

출근시간이 지나 한산하다.  

어린 티인가 촌놈 티인가.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에스컬레이터를 한번 더 타자고 한다.

에스컬 레이터 한 바퀴를 더 돌고 도착한 지하철에 탑승했다.

출입문  입구 쪽에 자리를 잡았다.

점까지 다녀오기로 하고 네 살 때 탔던 기억을 되짚는다.

"예전에 탔을 때 킥보드 타고 온 거 기억나?"

"녀, 앞에 있던 킥보드가 저쪽으로 혼자 쭈루루 굴러가서  할머니가 가져왔잖아요" 까르르륵 입을 막고 웃는다.

오늘 일한참 동안 기억을 하겠구나 싶다.


공항역을 지나는데 여기서 내리면 비행기 타는 공항이 맞냐고 묻는다.

지금 가면 비행기 탈 수 있냐며.


송정공원역을 지나면서 다음 역은 이모 왔다가 서울 갈 때 열차 타는 곳이라고 했다.

"그럼 지금 가면 기차도 탈 수 있어요?"


종점까지 두 정거장 전이다.

종점에서 내려도 되돌아오는 거 말고 딱히 갈 곳도 할 일도 없다.

번개처럼 번쩍 머리를 친다.

마침 여기까지 온 김에?

안될게 뭐 있어.

미남이가 아직 열차탈 기회가 없어 우리 꼭 같이 기차 타러 가자고  했던 약속도 떠올랐다.

"우리 열차 타볼까?"

"네에~~~" 대답이 우렁차다.

'내리실 역은 왼쪽입니다.' 안내방송이 나오고 가방을 챙겨 녀석 손을 붙들고 내렸다.


하필 멍멍이 인형에 장난감까지 담아 온 가방을 들고 녀석 손을 붙들었으니 휴대전화로 예매도 어렵다.

역 도착해 현장예매로 익산표를 결제하려다 또 번쩍 머리에 섬광이 지나간다.

굳이 꼭 익산? 반대방향도 있는데?

한창 녹음이 짙은 계절이니  자연풍광이 하행선 쪽이 더 멋질 것 같았다.

"죄송해요, 목포행은 몇 분에 있을까요?"

미남이 위해서 가는 거 맞아? 그...렇....지.

미남이는 어린것이 꽤 자연 친화적 성향인 아이다.


목적지를 목포로 정하고 도착시간에서 한 시간 정도 넉넉하게 여유를 두고 상행선까지 왕복표를 구입했다.


평소에 입 짧은 미남이라 내가 과자는 인색했지만 기차 여행의 맛은 군것질 아니던가.

오늘은 입맛 없네 건강에 해롭네 이따위 것들 나 몰라라 하기로 한다.


편의점에 들른 미남이는 평소처럼 딱 한 가지를 골랐다. 요즘 빠져있는 껌 한 통이 계산대에 올랐다.

"더 가져와도 돼, 오늘은 여행하는 날이니까"

껌 옆으로 납작한 초콜릿 한 개가 더 올려졌다.


SRT열차가 출발하고 기대했던 것보다 더 빠르게 들이 나타나고 초록이 꽉 찬 산이 나타났다.

나주역을 지나 역에서 산 떡이랑 초콜릿을 먹고 껌을 씹어 입풍선을 만든다며 용쓰는 사이 금세 목포역에 도착했다.


목포에 도착하면 카페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광주로 돌아가는 열차를 타기로 했다.

역 내에 있는 카페가 만원이었다.


열두 시를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카페 찾아 역 밖으로 나갔더니 해가 쨍쨍 내리 꽂힌다.

달궈진 아스팔트 지열에  반바지라 햇빛에  노출된 종아리가 후끈거린다.

카페를 찾아 신호등을 건너는데 카페는 보이지 않고 땡볕에 괴로운지 미남이도 얼굴을 찡그린다.


여기저기 간판 따라 기웃거리는데 어쩌다가 먼 산 쪽으로 시선이 갔다.  움직이는 물건을 따라 눈길을 옮기는데 말로만 듣던  목포 해상 케이블카인 듯했다.

"저기 케이블카가 보이네. 미남이도 보여?"

그냥 무심하게 던진 말이었다.

"우와 케이블카다"

아이구 덥네 말하듯 그냥 한번 쳐다나 보라고 한말이었다.

"우와 할머니 정말 케이블카예요"

이 녀석이 케이블카 좋아하나?

"타보고 싶어?"

휴가철이라 대기가 길까 조금 걱정이 됐지만

안 될게 뭐가 있어?


더워도 너무 덥다.

요 앞 신호등 바로 건너 있는 역까지 가는 더위도 무섭다.

오죽하면 올라가는 표 두 장을 포기할까 잠깐 망설이다 그래도 그건 아니지 싶어 역에 들어가 표를 반환하고 택시를 탔다.


입구에서 내려 탑승장 가는데도 가방 들고 미남이 손잡고 걷는데 날은 푹푹 찌고 지친다.


카페에서 못 먹었던 아이스크림을 편의점에서 사기로 했다.

편의점 입구에 들어서자 입구 매대에 장난감 중장비차 세트가 보란 듯 놓였다.

일평생 중장비차 기사님이  꿈인 미남이가 장난감 앞에 섰다.

"할머니, 이거 우리 집에 다른 색깔 모두 있죠오"

이 문장을 뜻이 같은 다른말로 표현하시오 라는 문제가 출제된다면 정답은

갖고싶다 갖고싶다 무한 반복이다.

미남이 집에는 세상 모든 중장비차 책도 있고 그 책에 나온 <모든> 차 종류 중 없는 게 없다.

"그럼. 미남이 집에  몇 개씩은 다 있잖아"


미남이는 아이스크림 냉장고 쪽으로 가서 콘아이스크림을 한 개 골라  계산대에 올렸다.

그 옆으로 살며시 내가 마실 오미자 음료수 한 병과 미남이가 눈독 들이던  중장비차 세트를 올렸다.

"이거 세 개 같이 계산해 주세요"

장남감 세트를 들고 편의점을 나서며 여행 기념품 사준거냐며 미남이가 물었다.



집에 똑같은 게 쌓였네, 인터넷에서 사면 절반 가격이네 미남이 엄마 잔소리는 흘려듣기로 한다.



미남이는 손잡이가 달린 장난감 상자를 들고 콘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케이블카를 탔다.

한 손으로 아이스크림을 들고 한 손으로는 반환점을 돌아오는 맞은편 케이블카에 열심히 손을 흔들어 다.


얼마 동안 흔들다 반응이 시원찮은지 미남이는 팔이 아프다며 옆에 뒀던  장난감 상자를 매만졌다.


"할머니, 할머니 돈 진짜 많이 써서 인제 어떡할 거예요?"


갑자기 목소리에 날을 세우고 날 취조한다.


"괜찮아 다음에 미남이가 할머니 집사 준다 했으니까 걱정 안 해. 그런데 어린이 집 선생님은 차 사드린다고 했다면서 너 돈 어~~엄청 많이 벌어야 하는데 다 사줄 수 있겠어?"

"아 참 어떡하지?"

"한 사람 건 취소해야 될 것 같아"

"그래요? 어떡하지...., "

"누구껄 취소해야 될까? 할머니도 고민된다 진짜"

잠시 고민이 깊어 보인다.


"할머니. 생각해 봤는데요 선생님껄 취소해야 될 것 같아요.

왜냐면 가족 거를 먼저 사야 하니까요 "


내일 어린이집 가면 말씀드린다고 했는데 장난감 자동차가 내일까지 제대로 돈값을 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탑승장에 있는 카페에 갔다.

미남이는 케이블카에서 콘아이스크림 한 개를 다 먹었고 입술에 귀여운 흔적을 잔뜩 남겼다. 그모습이 귀여워 일부러 한참동안 닦아주지 않았는데 녀석은 저 입술 상태를 알리가 없다.


아침도 건너뛰고 작은 떡 한 개 밖에 먹지 않았는데도 나는 딱히 당기는 게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카페에 들어간 이유는 카페 앞 배경으로 예쁘게 피어있는 이 백일홍 때문이었다.

꽃밭을 보고 잠시 망설이는데 미남이도 꽃밭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이런 걸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 녀석이다.


배부르다며 먹는 걸 거부하고 장난감 차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두고 공사장 놀이에 빠졌다.

나도 한자리 내어 주는 걸 잊지 않는다.

내 직함은 레미콘 트럭 사장님이란다.

기사님에서 하루아침에 사장님이 됐다. 더위를 무릎쓰고 멀리까지 와서 돈쓴 보람이 있다.

"레미콘차 사장님? 레미콘차 사장님?"

역시 여기서도 절대 혼자 놀지 않는 녀석이다.


녀석이 좋아하는 모습에 힘들었어도 오늘 오길 참 잘했다 싶었는데 싱그러운 백일홍이 바람 따라 나부끼는 모습이 어찌나 예쁘던지 안 왔으면 정말 어쩔 뻔했나 싶었다.


손님이 없는 카페에서 한참을 잘 쉬다가 카카오 택시를 타고 역으로 돌아왔다.


역에 있는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편의점 밖에 뽑기 기계가 있었다.

미남이와 큰길 중장비차 구경 다니는 곳에  문구점 오백 원짜리 뽑기 기계가 있는데 그곳은 미남이에게 참새 방앗간이다.

뽑기 좋아하는 미남이, 잠시 살펴보더니 오백 원을 여섯 개나 넣는 거라며 놀란다.

오늘 할머니 대책 없는(?) 플랙스 보고 지갑 걱정 해주고 있는 중이라 더 이상 말을 못 꺼낸다.


동전 교환해 오라며 천 원짜리 지폐 석장을 건넸다.

동전 여섯 개를 나란히 담고 손잡이를 돌리니 탱그렁 소리가 나면서 동그란 플라스틱이 나온다.

동네 오백 원짜리나 삼천 원 짜리나 별차이 없다.

내용물에 들어있는 설명서는 한자가 섞인 일본말이다.

"할머니, 제가 아는 한자가 있는데 여기에는 없어요 "

한일 두이 석삼

어린이 집에 한자 할아버지가 오신다며 막대 세 개 그려놓고 자랑하던 일이 생각났다.

"우리 미남이 세 글자나 아는데 아쉽게도 여기에는 없네"

"히잉"

입을 삐쭉거린다.


편의점 앞에 다시 섰다.

입구에 기다랗게 꽂혀있는 마시멜로  자석이 녀석을 끌었나 보다.

오늘  열일하는 내 카드 마지막까지 부탁해.

마시멜로를 손에 든 미남이는 맨 위에 핑크색 하트를 이로 당겨서 입안에 넣더니


"할머니 오늘은 왜 다 사줘요? 할머니가 이상한 날이에요. 꿈 있죠? 꿈. 지금은 상상하는 거일 수도 있고 꿈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할머니?"


어디서 들은 말은 기억했다 참 잘 써먹는 재주하나는 타고났다.


집에 도착해 편의점에서 샀던 중장비차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미남이가 차를 앞뒤로 밀다가

"자 덤프트럭 이제 출발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차를 쑥 밀었다.

"문 닫아야지.  위험합니다"

양 문이 열린 채 출발하는 차를 보고 이모가 말했다.


"이 차는 출발한 뒤에 문이 자동으로 닫힙니다"


케이블카 출발할 때 닫히지 않는 문을 보고 쫄아서 바짝 내 옆으로 붙어 앉던 미남이었다.

"미남아 걱정 마, 원래 케이블카는 출발하고 나서 자동으로 닫히는 거야"

팔을 둘러 미남이 옆구리를 감쌌다.


곧장 써먹는 재주를 또 부린다.


그냥 동네 지하철 체험하러 나섰다가 어찌어찌하다가 고속열차를 고 또 어찌어찌하다가 케이블카로 유달산을 넘었던 오늘.


미남이 때문에 몸살 날 것 같다며 잔뜩 생색을 냈지만

역에서 습장에서 다리 올려가며 폴짝폴짝 뛰던 미남이는 날 얼마나 행복하게 했던가.


시작은 너였지만 결국은 나의 여행이었다.


열차에서 미남이가 다음에는 나주 가자고 했다.

목포가는 열차 경유지에 나주가 있어서 고민없이 고른 지역일 것이다.

"그래 좋아"

"그럼 내일가요"

"방학 오늘 끝나잖아"

"아  맞다, 그럼 언제 가요?"

"겨울 방학 때 갈까?"

"좋아요 "


겨울에 약속 있는 여자다.

젊은 남자랑.

젊고 <잘생긴> 이라고 하고 싶지만 이미 노출된 사진이 손을 붙든다.


작가의 이전글 별거 아니지 않지만 해볼 만한 여름 방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