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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물젤리 Aug 31. 2023

나는 연예인인가 어릿광대인가 치어리더인가

네 살 미남이 이야기

비가 오는 날은 공사장 작업이 멈춘다. 종일 내린 비 때문에 중장비차 구경을 못 가게 된 날, 아이들이 없는 놀이터도 조용하다.어린이 집 차에서 내린 미남이가 오늘 이모할머니 집 가자고 했다.


택시를 타고  우리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우리 집 근처에는 사거리에 회전교차로가 있다. 회전교차로가 있는 곳 치고는 차량 통행이 그다지 많지 않고 조금 외진 곳이다.

회전교차로를 지나는데  갑자기 택시에서 내리자고 했다. 중장비차를 못 보는 대신 지나가는 트럭이나 자동차를 구경할 요량인 것이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집에 있으면 큰 일 나는 줄 알고 있는 녀석이라 미리 노란색 비옷을 챙겨서 나왔다. 비옷을 입히고 우산을 같이 쓰고 지나가는 차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종일 내렸던 비 때문에 회전교차로에는 빗물이 고여 있었다.  미남이는 차 바퀴에 튕겨져 나온 물폭탄을 구경하고 있었다.

인도 안으로 물이 튈 때마다 둘이 손잡고 도망가면서 아아악~~ 소리를 지르는 놀이에 재미가 들렸다.


한참을 놀던 미남이가 싫증이 났는지 회전교차로와 맞닿은 인도 끝으로 날 끌고 갔다.

인도 끝에는 횡단보도 있는 곳을 제외하고 철제 난간이 둘러져 있다. 미남이는 난간 앞에 바짝 붙어서 같이 서 있다가 빗물이 튀면 재빨리 도망가자고 했다.


몇 분 지나자 미남이는 금세 또 다른 놀이를 생각해 냈다. 날더러 도망치지 말고 물이 튀면 우산으로 막으라고 했다. "너는?"

"미남이는 도망갈 거예요 헤헤헤"

나를 총알받이도 아니고 물막이로 세우고 저만 도망을 가겠다고 했다.

비옷에 달린 모자를 더 깊이 씌워주었다.



난 쭈그리고 앉아 기다렸다가  물폭탄이 올 때마다 재빠르게 우산을 기울어 막아냈다. 방패삼은 우산 위로 물벼락이 쏟아졌다. 나는 챙피한데 미남이는 인도 안쪽으로 아아악 소리를 지르고 도망가서는 깔깔깔~~~ 좋다고 웃어댔다.


미남놀이학교 모범생으로서 시키는 대로 아주 잘하고 있는데 미남이는 또 새로운 놀이를 생각해 냈다. 휴대폰도 아닌데 녀석은 계속 최신 버전 놀이로 업데이트를 시켰다. 이번 버전은 꽤 강력하다. 

"할머니, 미남이처럼 크게 소리도 질러야죠"

"뭘 하라고?" 그것도 크자를  길게 빼면서 크게를 강조했다.


비 때문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뜸한 건 다행이지만 이 짜식아. 이러고 있는 것도 이미 부끄럽단다.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옷도 머리도 젖어서 큰길에 쭈그리고 앉아 우산으로 물놀이하면서 꺄아악 꺄아악~~이제 소리까지 질러대라고?

<비 오는 날 회전교차로 미친*> 짤로 인터넷에 떠돌아다니기 딱 좋은 그림이잖아.  머리에 꽃도 꽂을까?


미남이랑 놀다 보면 체통이란 걸 버려야 할 때가 숱하게 많다. 또 그런 순간이 오고야 만 것이다.  

급하게 '에라모르겠다' 버전으로 업데이드트를 했다.  

쭈그리고 앉아 대기하고 있다가 우산 깊숙이 얼굴을 가리고  아아악 꺄악 ~~~ 미남이가 시키는대로 크게 소리를 질렀다. 업데이트 한 덕을 톡톡히 보는지 한번 하고 나니 애쓰지 않아도 센서가 작동하는 것처럼 저절로 아아악 꺄아악 고함이  튀어나왔다.

미남이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미남이는 물놀이가 즐거운 게 아니라 그러고 있는 내가 웃겨 죽겠어서 숨 넘어가도록 웃어댔다.


싸이가 부르는 노래처럼 내가 저 짜식의 연예인인지 어릿광대인지 치어리더인지 아니면 극한직업 특집 체험 중인지 아 모르겠다.

미남이 웃음소리와 내가 질러대는 고함 소리가 연속되는 돌림노래처럼 빗속으로 번져 나갔다.


난간 근처에 있는 우리를 위해 속도를 낮추고 물이 고여있는 곳을 일부러 피해 가는 차들을 보고 속 모르는 네 살 난 어린 미남이는 에이 하면서 입을  삐죽거렸다.


내리던 비가 약해지고 교차로에 고이는 물이 줄어들자 미남이 웃음이 멈췄고 그 놀이도 끝이 났다.금세 약해진 빗줄기가 다행이었다.


새콤달콤 한 개를 입에 넣고 참새처럼 쫑알쫑알 대는 미남이 수다에 맞장구를 치면서 내가 사는 아파트 정원을 지나가고  있었다.

갑자기 바람이 휘~~ 불고 지나갔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이 잎에 담고 있던 비를 한꺼번에 후드득 아래로 쏟아냈다. 타다닥 탁탁 우박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우산을 때렸다.

"우와, 할머니 재밌어요"


미남이가 좋아하는 것들은 무엇이든 붙들고 싶다.

한번 지났던 바람은  다시 불어오지 않았다.

들고 있던 어린이집 가방을 미남이 어깨에 걸쳐주고  우산을 손에 쥐어줬다. 집 앞이고 머리도 옷도 이미 축축해진 나는 비를 피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미남아, 우산 꽉 잡아~~"

잎이 무성한 만만한 나무 아래에 미남이를 세우고  힘껏 흔들었다. 우산을 때리는 빗소리는 선명한데 내 안경은 뿌옇게 흐려졌다. 회전 교차로에 퍼졌던 미남이 웃음소리가 집 앞까지 따라 붙었다.


나는 미남이의 연예인인가 어릿광대인가 치어리더인가

내 머리는 둥둥 떠다니는 단어를 쫓느라 바쁘고 나무를 흔드는 내 손도 바쁘다.


미남이 네 살 여름 장마가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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