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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물젤리 Sep 05. 2023

할머니 볶음밥이 무서워

여섯 살 미남이

미남이 다섯 살 때 일이다.


놀이터에서 놀던  미남이랑 예은이가 집에서 놀고 싶다고 했다. 뭐든 가리지 않고  잘 먹어서 부러운 예은이는 미남이 집 올 때마다 꼭 밥을 달라고 하는데 그날도 조금 놀다가  배가 고프다고  했다.


 아직 저녁 준비가 되지 않았다. 냉장고를 뒤지고 싱크대를 열어봐도 뚝딱뚝딱 금방 만들어낼 마땅한 재료가 없었다.

야채칸에 덩그러니 당근 한 개 호박 한 개가 전부다. 간장 계란 볶음밥이라도 만들까 싶었는데 그 흔한 계란 한 개가 없었다.

쿠팡 파업으로 배송 중단 뉴스도 없었는데 텅 빈 냉장고가 영 못마땅하다.


호박이랑 당근을 썰어서 기름에 볶고 밥을 섞었다. 굴소스랑 간장 조금 섞어 간을 해서 접시에 담았다. 참기름도 빼먹지 않았다.


거실 테이블에 마주 앉은 두 아이가 한수저씩 떠서 입에 넣었다. 일순간 조용해졌고 아이들 표정이 금세 뭐 씹은 얼굴이 됐다. 아구아구 먹어야 하는데 내가 봐도 그런 대접을 받을만한 요리가 아니었다.


입안에 쓴 약을 털어 넣은 것처럼 멀쩡한 치아를 두고  아이들은 저작운동을 멈추더니  밥이 침에 녹아 저절로 목으로 넘어갈 때까지 버텼.


예은이가 맞은편 미남이를 향해 목을 쪽 뺐다. 미남이도 뭔가 알아채고 예은이 가까이 얼굴을 들이댔다.

예은이가 입을 미남이 귀에 바짝 댔다.

"미남아 맛이 없지?"

"응"  

내 귀에 보청기도 없는데 아이들 귓속말이 쏙쏙 잘 들렸다.


아이들은  내 눈치를 슬슬 살피면서 슬로 모션으로 조용히 수저를 접시 옆에 놓더니 고양이처럼 가만가만 일어나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먹지 않은 밥이 지들도 난감한지 내가 있는 거실에 있지를 못하고 굳이 방으로 피신을 했다.

볶음밥은  음식물 봉투에 버려졌다.

예은이가 미남이 할머니 볶음밥 이상하다고 집에 가서 꼭 말할 것만 같았다. 이게 무슨 망신이람.

구차하지만 집에 돌아갈 때 다섯 살 어린애를 붙들고 마땅한 재료가  없었다는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다음날이었다.  놀이터에서 놀던 두 아이가 그날도 집에서 놀고 싶다고 했다. 분명 예은이는 또  밥을 달라고 할 것이다. 볶음밥의 굴욕을 만회할 기회가 다.  아이들이 먹기 좋게 달달하게 양념한 한우 불고기를 준비했다.


시간이 제법 지났는데   밥 달라는 말이 없었다.

"얘들아 밥 먹자"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예은이가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깜짝 놀라 나를 올려다봤다.


"무슨 밥인데요 할머니?"


예은이 표정도 재밌고 무슨 밥이냐고 묻는 속뜻이 우스워서 큭큭 웃고 있는데  미남이 대답이 걸작이다.


"예은아!!당연히 볶음밥은 아니지이!!


미남이도 볶음밥이 많이 두려웠던가보다.


테이블에 앉은 아이들은 금방 일어섰고 식판은 싹 비워져 있었다.

예은이가 집에 가서 미남이 할머니 불고기 잘하신다는 얘기는 빼먹을 것만 같아  조금 억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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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미남이는 여섯 . 며칠 전 일이었다.


"사장님 여기가 우리 동네 볶음밥 맛집이네요 너무 맛있어요"


볶음밥 한수저를 떠서 맛을 본 미남이가 최고로 멋진 칭찬을 했다. 이틀 전에  볶음밥을 먹다가 다시 해달라는 미남이와 했던 약속을 지켰다.

미남이가 좋아하는  볶음밥은 눈감고도 한다.

싫어하는 채소는 보이지 않을 만큼  잘게 다지고 좋아하는  햄은 크게 넣어 도드라져 보이게  하는 방법이다.



맛집이라고 호들갑을 떨던 미남이는 손님 놀이를 시작했다. 호출벨이라면서 노란색 컵을 식탁 위에 엎어놓고  "사장님 물 주세요 " "사장님 빨대 주세요" 컵을 탁탁 내리치면서 툭하면 나를 불러댔다.

나는 "네 손님" "네 손님"  공손하게 손님 대접을 하면서 우리의 티키타카를 이어갔다.


웬만한 일은 다 기억하는 미남이가 맛없던 그때의 볶음밥  사건은 기억을 하지 못했다. 그때 일을 나에게 들은 미남이가 다음에 꼭 예은이를 초대해서 오늘같은  볶음밥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일그러진 체면을 다시 짱짱하게  세우고 싶은건 미남이도 마찬가지인가보다.


다음에는 햄을 더 넉넉하게 넣고 치즈까지 가득 얹어내야 겠다.

"예은아 볶음밥 어때?" 이 말 대신

"예은아 우리 할머니 볶음밥 엄청 맛있지?"

거보란듯 자신있게 물어볼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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