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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핸 Feb 08. 2024

조급함은 예술적 변화와 관계가 있을까?

시대상 비롯된 조급함이 주는 예술적 인지에 영향

        필자는 다양한 배경을 지닌 아티스트, 큐레이터, 갤러리스트 그리고 다른 미술전공 관련자들은 만난 경험이 있다. 그들의 나이는 필자와 모두 비슷했으므로, 대략적인 나이는 사회적으로 자주 언급되는 한국식 명칭 MZ, 정확히 국제적으론 Gen Z에 모두 걸맞은 이들이었다. 이러한 공통점을 가진 것 때문인지, 공교롭게도 모두 비슷한 특징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바로 작업적인 측면에서 열정적인 수행성을 느낄 수가 있었는데, 무언가를 새로 제작한다는 생산성에 특히 초점을 두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만의 왜곡성을 배제한 채 위에 언급된 예술계의 인물들의 작업과정을 말하자면, 거의 이 아티스트들은 한 번도 장기적인 휴식을 사치라고 여길 정도로 작업들을 끊임없이 생산을 했었다. 그것이 어떤 형태 (비디오, 사운드, 페인팅, 입체, 사진 등)로든 그들 머릿속 생각이 바로 밖으로 파생되든 말이다.  


아티스트의 열정적인 자세는 보통 두 가지 경우로 나눠지는데, 하나는 단순히 예술에 대한 불타오르는 애정, 두 번째는 그 외 다른 요인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두 가지가 한 번에 겹쳐서 또 다른 경우도 있다. 필자가 바로 여기에 해당했었다. 만약 단순히 이들에 대해 신격화할 정도로만 이렇게 말한다면은 나는 이 글을 사실 적을 필요조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장점이 따르듯 단점도 마찬가지로 뒤따라오는 치명적인 자연의 법칙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게다가 한 부분이 극으로 갈수록 반대의 성질도 극으로 가는 비례성도 반드시 참고해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는 근본적인 문제를 최대한 억제시킬 수 있다. ‘조급함’ - 성향상 신속성을 무의식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닌 즉 ‘제도적’인 배경으로 인한 사회적 반강제성에 말이다. 단순히 우리 모두가 성격적인 조급함을 가졌다 하더라도 이는 본인의 진지성 정도에 따라 각 대상에 요구하는 신속성은 모두 다르므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에는 크게 적용되지 않을 거라 믿는다. 만약 반대로 성격적으로 조급함을 표면적으로 적용을 했다면 아티스트들은 기필코 말하지만 분명히 열정적인 자세로 본인의 작업에 함부로 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 그렇다면 왜 굳이 ‘성향상’이 아닌 ‘제도적’인 측면에서 조급합이 생겨난다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사회적인 체계를 들여다보는 것이 직접적인 원인을 모색하는 대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거라 본다. 이는 각 국가와 대륙적 기준마다 모두 다르니 필자가 거주하고 활동했던 두 지역을 예를 들어보고자 한다. 참고로 필자는 독일 미술대학교에 성공적으로 졸업까지 한 상황이므로 여기 사회적 특성에 관해 정확히 설명을 나열할 수가 있다. 먼저 독일은 두 번의 거센 타격(1차, 2차 대전)을 받았음에도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발전을 이룬 국가이므로, 전반전인 사회 분위기는 개개인에 압박을 가하지 않아 거의 모두가 여유롭게 개인에 시간을 사용할 기회가 많다. 심지어 유럽 내에서도 악명 높은 과한 세금징수율 때문인지는 몰라도 교육비 면제 (사실상 완전한 무료는 아니지만), 탄탄한 보험체계(Künstlersozialkasse) 그리고 지원단체(BBK) 등과 같은 경제적인 지원이 꽤 힘을 발휘한다. 특히 초기에 경제적으로 취약한 아티스트들에게는 제격이다. 그래서 이러한 국가의 특징 때문인지, 만났던 수많은 독일인(국적상) 아티스트들은 크게 앞으로의 일에 조급함은 거의 없어 보였다. 오히려 매사에 여유로웠다. 물론 개개인으로 따진다면 단순히 완벽주의적 성향상 예외인 경우도 배제할 순 없다.  

 

반대로 한국은 어떨까? 당시 대한제국은 얼마 안 가 불가피한 일제강점기를 겪었고 이것도 모자라 미군정을 거친 얼마 뒤 반대 세력인 북한에게 침략을 당해 치명적인 타격을 총 두 번이나 당해 무너지는 상황으로부터 모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매번 실패한 근대화 실패로부터 서양 문물의 유입은 식민지배 하에서 직접적으로 불가능했으므로 일본으로 먼저 받아진 문물들로 유입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한국의 서양미술을 처음으로 도입한 시기는 1910년 도쿄미술학교에 유학하고 돌아온 고희동으로 본격적으로 시작했었다. 이후 김관호를 비롯해 얼마 후 1911년 한국 최초의 미술교육기관인 경성서화미술원이 도화서를 대체해 설립되었다. 당시 일본에서 공부했던 조선인 유학생들로 인해 처음으로 접하게 된 서양미술의 장르는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나뉜다 – 첫 번째는 야수/표현파적 경향과 추상적 경향이었다. 이 당시 늦게 시작된 서양미술로부터 최대한 신속하게 모사를 통한 생산은 전자가 훨씬 유리했으므로 자연스럽게 야수, 표현주의가 다수의 공감대를 차지했었다. 추상화는 오래 축적된 복합적인 역사적 기록의 흐름과 일정 수준의 분석적이고 이지적인 시행착오를 요구함에 따라 장기적인 시간이 필요했으므로 당시 한국 상황에선 매우 비효율적일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추상미술이 한국에 주류로 잡게 된 시기도 40년 후인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전후 1세대 청년작가들이 주도했을 때부터 다.


즉 애초에 서양미술 발원지인 유럽에선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노하우, 운동 그리고 흐름을 겪어와 탄탄한 배경에 예술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반면 두 번의 역사적 풍파를 겪었던 한국은 불안정한 체계로 인해 독자적인 개발은커녕 거의 외부의 문물을 받아 시급히 새롭게 시작해 유럽처럼 다양성을 추구하기엔 시기적 문화적으로 늦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미술평론가 오광수 주장에 의하면, 한국은 유럽(독일)과 달리 특수한 배경을 지니고 있다 보니 오늘날 까지도 감각적 표현적 요소는 타 국가에 비해 우세한 반면 1980-1990년대로 이어지는 현대미술의 전개과정에서 논리적, 분석적, 합리적 그리고 창의적 요소가 빈약함에 따라  한국 미술의 허약함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이렇게 미술을 최대한 빨리 수용하고 발전을 시키고자 개인적인 연구로 나온 작품의 뜻깊은 의미와 고유성 등보다는 생산성에 힘을 실어 미술품의 양을 늘리는 데에 초점을 두었다. 여기서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자본주의의 성질은 점점 심화되어 대중문화도 덩달아 발전해 그 특성을 오늘날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두 특성이 만나면서 생긴 흐름은 작가 개개인이 고유하면서 시대를 역행 혹은 앞서가는 작품을 만들기보단 현존하는 트렌드를 본 작품에 바탕으로 삼으면서 팝아트 그리고 그래픽과 밀접한 산업적이면서도 기술적으로 우세한 구상적인 작품들의 비율이 비교적 높아졌다. 사실 지속적이고 신속한 산업화로 파생된 시대적 배경에서 자라온 대중에게는 더욱 해당 작품에 대해 자극을 받을 수 있는 경로와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다른 장르보단 기회가 많다. 따라서 현재 한국 ‘젊은’ 예술작가들은 대중들을 최대한 단시간 안에 효율적으로 설득을 시켜 경제적인 수익을 창출하거나 명성을 쌓아 즉 안정화된 자신을 되고자 하는 일명 ‘부귀영화’와 같은 한국사회의 제도로 극대화된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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