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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산 Feb 10. 2024

젊지도 늙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전운이 감도는 의료계

#1 불의에 저항할 만큼 젊지 않았던 나


2020년 의사 파업 때 난 대학병원 임상교수였다.


임상교수란 아직 정교수 발령을 받지 않은 젊은 교수를 말한다. 알맹이만 놓고 보자면 대학병원에 고용된 페이닥터 같은 계약직 신분이다. 그래도 호칭은 일단 '교수님'이고 하는 일도 매우 많았다. 환자를 진료하고, 학생과 전공의를 교육하는 와중에 교수님 연구도 도와야 하고, 내 연구 실적도 쌓아야 하는 만능 일꾼이었다.


2020년 의대생과 전공의는 정부의 불의에 맞서 집단 휴학과 파업을 하였다. 하지만, 환자들이 진료받지 못하는 일은 없었다. 왜냐면 교수들이 전공의 몫까지 일했기 때문이다. 전공의 업무가 과중하긴 하지만, 결국은 교수의 진료 보조일 뿐이므로 교수만 더 고생하면 표면적으로는 대학병원이 마비되지 않고 돌아간다.


그러나, 아무래도 늙은 교수님이 과로하는 건 한계가 있으므로 젊은 교수가 일을 더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난 교수 중 가장 막내였다. 비록 의사 파업에 참여하진 않았으나, 나도 나름의 전쟁을 치렀던 셈이다. 응급실과 수술실이 '정말로' 문을 닫는 일이 없도록, 여론이 최악으로 치닫지 않도록, 파업의 최전선에 있는 후배들이 다치지 않도록 말이다.


당시 어떤 기사는 선배 의사가 후배 의사를 뒤에서 조종해 파업으로 내몬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그건 잘못된 해석이다. 우선 대학병원에서 의사가 파업한다면 전공의(인턴 포함)가 하는 게 나을까? 아니면 교수가 하는 게 나을까? 당연히 전공의다. 교수는 전공의 일까지 할 수 있지만, 전공의는 교수를 대체할 수 없다. 그리고 파업이 가장 절실한 이 또한 전공의이다. 잘못된 의료 정책의 부작용은 수년이 지난 뒤 발생하는데, 그때 가장 활발하게 일할 의사들이 지금의 전공의이기 때문이다. 교수는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무사히 은퇴하면 그만이다.


늙은 의사는 한국의 의료 정책이 산으로 가든 말든, 그리하여 젊은 의사와 국민들이 피해를 떠안든 말든 솔직히 관심이 없다. 어쩌면 나도 그랬던 걸지도 모르겠다. "병원은 내가 지킬 테니, 걱정하지 말고 잘 싸우고 와라!"라고 전공의를 다독였지만, 실은 자리를 박차고 나올 용기가 없었던 게 아닐까.


전공의들이 야반도주하듯 떠나 난장판으로 내버려진 당직실을 홀로 정리하면서 싱숭생숭한 죄책감이 들었다. "젊은이들은 투쟁하는데, 나는 벌써 몸 사리는 나이가 되어 버린 거냐?"라고 말이다.



#2 불의를 외면하기엔 아직 살날이 많은 나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난 의사가 파업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① 집단 구성원들의 이해관계가 너무 달라 뭉치기 쉽지 않음

② 의사 중 기득권을 가진 분들의 보신주의

③ 직업 특징상 의사 파업을 지지하는 국민이 없음


그런데 그땐 정부가 이 정도로 지나친 정책을 밀어붙일 줄 상상도 못했다. 지금까지 나온 정책이 어느 정도 수준이냐면 다른 직군이라면 진즉 총파업하고 난리 나고도 남을 정도라는 거다. 공무원님께서도 그걸 아니까 이미 옷도 이쁘게 맞춰 입으셨더라. 선제적으로 이미 재난 상황인 것처럼 연출하고 있고, 그건 의사를 '재난의 원인'으로 보겠다는 것이다. 마치 의사와 싸우고 싶어 안달이 난 듯하다.


적(?)은 이미 만반의 대비를 했는데, 그럼 의사는 뭐 하고 있는가?


우선 정부의 폭탄 발표 당일 대한의사협회 회장님이 도망쳤다. 물론 정부를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겠다는 명분을 발표했지만, 의사 회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본격적으로 파업 단계에 돌입하면 의사 면허를 박탈당할 수 있으니 회장이 피신한 거 아니냐는 조롱 섞인 의견도 나올 정도였다.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다.


당장 대책을 세워야 하는 골든 타임에 구심점이 사라져 아무런 공식 반응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의사는 파업을 논의하기 전에 새로운 수장부터 뽑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정부가 의사들이 '설 연휴 이후'부터 파업할 거라고 말하는 건 다 이유가 있다.


2024년 2월 7일, 의사협회는 긴급총회를 열었다. 정부의 무책임한 발표 이후 열린 첫 회의인지라 회원들의 관심이 많았고 나도 그랬다. 회의가 8시였기 때문에 퇴근 후 직접 의사협회에 찾아가 회의를 참관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현장의 분위기를 직접 보고 싶었다. 의사협회에 직접 방문한 건 의사 면허 등록 이후 처음이었다.


긴급총회에서 어떤 내용이 나왔는지보단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 적는 게 나을 것 같다. 어차피 별 내용도 없었기 때문이다. 의협의 긴급총회는 '파업을 할 건가?'를 논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새로운 대표를 뽑는 걸 논하는 자리였다. 심지어 '누굴 뽑는가?'도 아니고, '언제 선거를 하냐?' 단계에서 이미 의원들끼리 고성이 오갔다. 말하자면 파업의 ㅍ은커녕 선거의 ㅅ도 난항이 예상된다. 고상하신 의협 대의원님들에겐 파업 같은 (이젠 의사 면허를 잃을 수도 있는) 무서운 것보다 자신의 안위를 잘 지켜줄 새 의협 대표를 세우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전공의들이 의사협회를 믿지 못하고 독자노선을 가겠다고 하는 것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늙은이들의 회의를 보며 '이 집단엔 일말의 희망조차 없어 보인다'고 생각했으니까.


아직은 내가 불의에 순응할 만큼 '늙진' 않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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