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성인(聖人)을 만나다.

일상 속에 평범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성인(聖人) 이야기

by 손서율


금요일 퇴근길


나는 만원 지하철 인파 속에 낑긴 채 손잡이를 간신히 부여잡고 서있었다. 한주를 꼬박 버텨낸 내 저질 체력에 한계가 왔는지 오늘따라 자주 신던 하이힐마저 버거워 다리가 배배 꼬인다.


"이번 역은 금호, 금호역입니다."

그때 내 앞에 앉아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났다.


'후우 살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제서야 다리에 피가 통하는 것 같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앉은 지 5분도 안되어 사막의 오아시스 같았던 소중한 자리를 다시 반납해야 했다.




70대 정도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를 4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아들이 부축하며 걸어와 내 앞에 서더니 말을 걸었다.


"죄송한데.. 자리 좀 양보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재빨리 고개를 들어 노약자석을 살폈는데 자리가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네 앉으세요"


그렇게 자리를 양보해 드리고 일어섰는데 앞으로 이 상태로 30분은 더 가야 한다는 생각에 막막함이 밀려왔다.


'아니.. 이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하이힐 신은 나에게..'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을 뻔했다.


그런데 그 부자를 찬찬히 살펴보니 할아버지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눈을 지그시 감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고 계셨는데 그 모습이 꽤나 위태로워 보였다.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엠블런스를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목적지까지는 어떻게든 견뎌내야 하니.. 아들은 할아버지 앞에 서서 두 손을 꼭 마주 잡은 채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힘들어하실 때마다 아들은 할아버지 손을 꼭꼭 누르며 주물러 주었는데 마치 "아버지 조금만 더 힘을 내세요"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부자는 맞잡은 손에 서로를 의지한 채 아무 말 없이 묵묵하게 위기를 견뎌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나를 제외한, 지하철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휴대폰을 들여다보느라 이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고


부자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목적지에 다다를 때까지 할아버지가 잘 버텨주시길 기도하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20여 분 가량의 기나긴 시간이 흘렀고 점점 더 힘들어하시는 할아버지가 걱정되는 마음에 아픈 다리의 감각조차 잊어버릴 때쯤..


"이번 역은 홍제, 홍제역입니다"


20분 내내 할아버지의 두 손을 단 한 번도 놓지 않고 있던 아들이 드디어 할아버지를 조심스럽게 안아서 일으켜 세웠다.


"홍제예요 홍제! 내리셔야 해요"


아들은 할아버지를 부축하며 출입문 앞으로 걸어갔고 나는 혹여나 할아버지가 쓰러지시진 않을까 걱정되어 그들이 안전하게 내릴 때까지 뒤에 바짝 붙어 서서 정황을 살피고 있었는데 문이 열리고 아들이 휙 돌아보더니 내게 말했다.


"자리 양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네.."


그렇게 부자는 무사히 열차에서 내렸고 스크린도어가 닫히기 직전, 아들이 할아버지에게 건네는 말을 듣게 되었는데


그 말을 듣고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았다.




"어르신 댁이 어디세요? 그 근처 병원으로 가요"


성인(聖人)은 현세에서도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평범한 모습으로


"선행"이 "능력"이라는 범주 안에 포함된다면 그를 따라올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는 일면식도 없는 낯선 노인의 손을 주저 없이 꼭 잡아줄 수 있는 따뜻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노력해야 그만큼의 그릇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