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막색소변성증
그 아이를 처음 본 곳은 회사 복도였다.
복도를 공유하는 사무실은 그 아이가 속해 있는 사무실과 내가 있는 사무실 둘 뿐이었다.
그래서 복도에서 다른 사무실 직원을 만나면 간단하게 인사말을 나누거나, 목례를 하거나 했다.
근데 유독 그 아이만 늘 내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큰 키에 마른 몸매, 하얀 피부, 어깨까지 내려오는 웨이브 머리, 동양적인 이목구비에 얼굴도 작고 예뻤지만 늘 표정이 없었다.
내가 가볍게 목례를 해도 무시했고, 못 본 건가 싶어 45도 인사를 해도 무시했다.
쳇! 사람이 인사하면 받아줘야지 뭐 저렇게 인성이 개떡이냐!! 속으로 생각했고, 그런 날짜가 좀 쌓이면서 나도 인사를 하지 않고 머리를 꼿꼿이 들고 앞을 지나갔다.
가끔 마주치긴 했지만 볼 때마다 그냥 무시하길 몇 달이 지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 아이가 속해있는 과 직원과 이야기하다가 슬쩍 한번 물어봤다.
"근데요, 그 S라는 직원 있죠? "
"아 S?, 어 왜?
"별로 어울리는 직원도 없고, 제가 인사해도 하도 안 받아줘서 어떤 사람인가 궁금해서요..."
"아... S 시각장애인이야. 너 못 봤을 거야."
"헉... 그랬구나..."
S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스틱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고, 그냥 비장애인과 별반 다를 바 없이 다녔다.
단지 조금 느렸던 것, 복도에서는 항상 벽을 가까이 두고 다녔던 것 외에는 앞이 안 보인다는 걸 전혀 인식할 수 없었다.
검은 눈동자도 항상 사람을 보고 있었고, 화장실을 가는 것도 아주 자연스러웠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는 내가 먼저 소리 내어 인사해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우리가 만나는 장소는 고작 화장실뿐이었고, 몇 번을 망설이다
"안녕하세요, 저 앞 사무실에 있는 대보르미라고 해요. 어디 아프시거나 약 필요하시면 제 사무실로 오세요~"
"아... 네..."
"제가 S님 앞이 안 보인다는 거 몰랐어요."
"아... 네..."
그렇게 우리는 말을 텄고, S는 가끔씩 나를 찾아왔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우리가 동갑이라는 것도 알게 됐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말을 놓고 친구처럼 지내기로 했다.
주변에 청각장애인은 몇을 봤지만, 시각장애인은 처음이었고, 대부분 시각장애인은 눈동자가 다른 곳을 향하거나 눈을 감고 있거나 해서 바로 아 이분 시각장애인이구나 느낄 수 있었는데 S는 그냥 비장애인과 같이 서있으면 구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S가 궁금했다. 어떻게 안 보이는데 스틱도 없이 이렇게 잘 걷고 다니는지... 내가 이야기하는 색깔들은 알고 있는 건지, 모양이나 생김새는 어떻게 느끼는 건지...
우리가 좀 더 가까워지려면 시간이 필요해서 난 S에게 퇴근 후에 만나서 저녁 한번 먹자는 데이트 신청을 했고, S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고 그날 나는 S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됐다.
S는 보통의 학생들처럼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안경을 끼기는 했지만, 앞을 보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고 했다.
스무 살 되던 해에 안경점에서 교정시력이 너무 안 나오니 병원 가 볼 것을 권유했고, 그제야 병원에 가서 여러 검사 끝에 병명을 알게 됐다고 했다.
망막색소변성증.
그렇게 S는 서서히 시력을 잃었고, 지금은 눈을 떴을 때 중간은 검은 물체가 가려져 보이지 않고, 시야를 동그라미 형태로 본다면 외곽만 살짝 보인다 했다. 아직은 완전한 전맹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스틱 없이도 다니고 있고, 뒤늦게 시각장애인이 된 상태라 점자는 읽지 못한다고 했다.(점자 읽기가 생각보다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한참 외모에 관심을 가지고, 꾸미고 멋 낼 시기, 죽어라 공부했던 고3을 벗어난 시기에 병을 알게 된 S가 받았을 충격은 감히 내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S는 덤덤했다. 이야기하며 감정의 동요도 거의 없었고, 그냥 그랬어하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대학졸업 후 시각장애인만 있는 전용콜센터에서 근무하고, 또 복지관에서도 근무하다가 공무원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정했고, 먼저 합격한 분이 도움을 많이 줬었는데 그분이 지금의 남편으로 결혼 8년 차다.
남편의 도움으로 S도 무사히 공무원 시험을 합격했다고 한다.
덤덤히 이야기하던 S가 직장 생활을 이야기하며 처음으로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우리 회사는 장애인을 일정비율 채용을 해야 했는데 시각장애인을 채용한 것은 S가 처음이었다.
채용과정에서도 여러 말들이 많았다고 했는데 결국은 S가 최종합격을 했고, S의 직장 생활을 위해 2천만 원 상당의 글을 읽어주는 보조공학기도 함께 구입해 줬다고 한다.
그럼에도 S는 많은 일들을 혼자 해내기가 어려웠고,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들도 많았다.
보조공학기가 PDF파일은 읽지를 못했고, 그 외 읽어내지 못하는 문서들도 많이 있었다.
S가 속해있는 과는 회사 내에서 가장 바쁘기로 유명한 과이고, 직원들은 화장실 한 번 다녀오기도 벅찰 정도로 일거리가 많았다.
반면 S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이 없었고, S에게는 정말 간단한 업무정도만 넘겨졌다.
출근해서 S는 지루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 나는 쓸모가 있는 사람인가, 무너지는 자존감 앞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생각하고, 다짐하며 버티며 버티고 있던 어느 날.
그날은 회식이 있었고, 얼큰하게 취하신 팀장님이 S에게,
"S 씨 금방 관둘 줄 알았더니 용케도 잘 버티고 있네. 하루종일 멀뚱멀뚱 할 일 없이 잘 버티고 있어~"
비꼬아 이야기하고 있는 그분 앞에서 곧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꾹 참고 집으로 돌아가서 많이 울었다고 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S가 우는 모습을 봤다.
하얀 얼굴에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아팠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 소파에 멍하니 앉아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 누가 장애를 원해서 가졌을까... 그 누가 장애가 내게 올 거라는 생각을 하며 살까...
나는 S가 가진 질환에 대해서도 공부해 보고, 시각장애인들이 만들거나 나온 영상을 찾아서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