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미디어-이미지의 관계성에 대한 소고
※ 글 매우 딱딱함 주의
바르트의 『밝은 방』에 경의를 표하며
감성적 지각이 그 자체로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찍이 이성이 지배하던 세계에서 감성은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엑스트라에 가까웠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성적 동물’이라고 불리는 인간의 감성적 지각은 서양철학사에서 이른바 ‘이성의 시대’로 칭해지는 근대에 이르러 독자적인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18세기 독일의 철학자 바움가르텐은 ‘감성학’으로서의 미학의 존립 가능성을 주창하며 감성적 지각의 타당성을 옹호하였다. 바움가르텐은 자신의 저서 『미학』에서 미학을 ‘감성적 인식에 관한 학문’이라고 규정하였다. 감성적 지각을 학문적 탐구 대상의 반열에 올린 것이다. 바움가르텐의 이러한 시도는 인간의 본성을 지성에 국한하는 협소한 태도를 극복하고 논리적 사유능력과 감성적 지각능력을 본성으로 하는 전인적 인간상 추구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바움가르텐 이후로 감성적 지각은 여러 학자에 의해서 다양한 형태로 논의되었다. 20세기 프랑스의 기호학자이자 철학자인 롤랑 바르트도 그중 하나이다. 바르트는 그의 저서 『밝은 방』에서 필름 사진에서 느껴지는 이중적 요소로 스투디움과 푼크툼을 제시하였다.
스투디움은 사진이 가지는 일반적인 지식과 교양과 관련된 것으로 코드화되어있다. 스투디움은 윤리적, 정치적, 교양적, 문화적 지식을 기반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요소이다. 이는 일종의 정보를 담은 부분인데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어떤 가족사진을 보면서 옷차림을 통해 시대적 배경과 문화적 맥락을 파악하고 사진에서 느껴지는 가족주의적인 분위기를 읽는 것이 바로 스투디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스투디움은 이미지의 수용과 감성적 지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에 해당하지는 않는다. 스투디움은 단지 일반적이고 문화적으로 세련된 흥미만을 일으킬 뿐 감상자를 관통하는 강력한 감정을 촉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푼크툼은 이야기가 다르다. 푼크툼은 라틴어로 상처, 찌름, 흔적 등의 의미를 지니는 말로 어떤 사진을 보았을 때 화살처럼 나와 감상자를 꿰뚫는 주관적인 감정을 말한다. 바르트는 사진의 푼크툼을 “사진 안에서 나를 찌르는(그뿐만 아니라 나에게 상처를 주고 완력을 쓰는) 그 우연”이라고 이야기한다. 바르트가 말하는 푼크툼은 우연적이고 주관적인 부분이자 세부 요소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양과 지식을 통해 파악되는 스투디움과 다르게 감상자가 자신이 느낀 푼크툼을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언명하는 것은 어렵다. 또한 스투디움처럼 사진 이미지를 보는 이가 찾고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푼크툼이 감상자를 급습한다. 마치 뾰족한 화살이 육체를 관통하고 날 선 무언가가 피부를 찌르는 것처럼 말이다. 살을 파고들고 가슴을 후벼 파는 이 고통은 역설적으로 감상자에게 강렬한 감동을 남긴다. 무엇이라 형언할 수 없는 버릇없고 하찮은 세부이지만 푼크툼이라는 감성적 지각은 그것을 감각하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보잘것없는 요소가 아니게 된다. 감상자를 찌르는 푼크툼은 강력한 감정을 동반하며 개인의 삶과 사적인 영역과 연관해 그의 영혼을 사로잡는다.
이렇게 ‘동일한 세계에 속하지 않는 이질적이고도 불연속적인 두 요소’인 스투디움과 푼크툼은 사진 안에 존재하면서 기존의 이미지와 수용 방식에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어냈다. 특히 바르트의 푼크툼은 사진을 중심으로 한 이미지 수용과 관련해서 이미지를 읽기의 대상에서 주관적 느끼기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이미지의 지각과 수용의 문제를 개인의 주관적 경험 중심으로 파악하게 만든 것이다. 푼크툼이 만들어낸 이와 같은 감성적 지각의 속성은 푼크툼 뒤에 나타난 다양한 감성적 지각들에 의해 계승되었고 이를 자양분으로 하여 새로운 이미지의 감성적 지각들이 태동하였다. 또한 푼크툼도 모태가 되는 여러 감성적 지각에 대한 논의 아래에서 싹을 틔웠다는 점도 자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본 고에서는 디지털 시대의 푼크툼의 운명을 포착하기 위해 푼크툼의 속성을 중심으로 이미지와 그 이미지를 수용하는 감성적 지각의 뿌리와 가지를 찾는 여정을 떠나보고자 한다.
20세기 바르트가 사진 이미지 안의 스투디움과 푼크툼을 통해 감성적 지각을 이야기했다면 19세기 니체는 예술을 이루는 두 요소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신화적인 형상을 제시하였다.
니체에 따르면 태양의 신 아폴론은 꿈과 이성을 상징한다. 이와 다르게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는 도취와 황홀을 상징한다. 그리스 예술은 아폴론적인 예술 충동과 디오니소스적인 예술 충동이 조화를 이루면서 발전하였다. 아폴론적인 예술 충동은 조형예술과 서사시의 형태로 나타났고 디오니소스적인 예술 충동은 음악, 춤과 같은 비조형 예술로 표현되었다. 이성과 합리성을 강조했던 소크라테스 이래로 이성 바깥의 감성과 감정을 학문적 논의에서 배제해 왔던 전통 형이상학의 영향 아래 자유분방함과 도취, 열정 등의 속성은 무시되었다. 니체는 이러한 근대의 이성중심적이고 이분법적인 사유가 그 시대의 문명을 병들게 하였다고 역설하였다. 이에 따라 니체는 가치전환을 통해 디오니소스적인 예술 충동에 기원한 예술을 부흥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니체에 따르면 아폴론적인 것은 보고 인식하는 차원이고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내가 주체로서 경험하는 차원의 것이다. 이는 바르트가 제시한 스투디움과 푼크툼의 성격과 많이 닮아있다. 특히 니체가 말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경험 자체에 대한 일종의 황홀감, 몰입의 감정에서 느껴지는 즐거움과 쾌감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푼크툼이 가지고 있는 여러 속성과 맥을 같이 한다. 아폴론적인 것이 평정한 상태라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내적인 움직임, 그야말로 무엇인가를 발동시키는 힘과 같은 것이다. 거부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힘이라는 점에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아폴론적인 것과 비교가 된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고통과 쾌감이 함께하는 역설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모순적인 구조는 비극적인 카타르시스나 숭고와 함께 사유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통을 수반하는 푼크툼의 속성과 연결된다. 인식이 아닌 하나의 주관적 체험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고통과 공존하는 강력한 힘이라는 점에서 니체의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어쩌면 푼크툼의 청사진 격에 해당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19세기 정신분석학의 선구자, 프로이트도 이른바 두려운 낯섦(Das Unheimliche)이라는 감성적 지각을 이야기하였다. 프로이트는 두려운 낯설음이라는 감정이 그동안의 감성적 지각에 대한 논의에서 소외되어 왔음을 역설하며 이에 대한 학문적 탐구의 필요성을 주창하였다.
‘익숙하지만 두려움’이라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하는 두려운 낯섦(Das Unheimliche)은 친밀한 이미지, 사건, 상황으로부터 낯설고 두려운 감정을 느끼는 심리적 공포를 말한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익숙한 방, 탁자 위에 놓인 램프가 갑자기 떠오르는 것과 같이 기이한 상황을 목도했을 때 우리는 두려운 낯섦을 느낀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두려운 낯섦이란 친숙하면서 동시에 낯선 양가적인 속성을 지닌 감정이다. 그는 두려운 낯섦이란 이미 우리가 이전에 경험했던 친숙했던 무언가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며 이것이 낯설고 두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오랜 시간 자아가 그것을 ‘억압’해 왔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두렵고 섬뜩하고 낯선 것이란 사실 이전부터 우리 안에 있었던 것이라는 말이다.
두려운 낯섦이 지니는 이와 같은 속성은 여러 지점에서 바르트의 푼크툼과 유사하다. 두려운 낯섦은 생소하지만 강렬한 감정인 동시에 분명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불투명한 감성적 지각이다. 감정의 내밀한 양태를 무엇이라 상술할 수는 없지만 큰 고통과 함께 찾아와 비의지적으로 감상자를 파고든다는 점에서 푼크툼과 두려운 낯섦, 두 감성적 지각이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프로이트의 두려운 낯섦이 감상자의 주관적인 기억과 경험, 나아가 사랑과 죽음과 연관한다는 점에서 두려운 낯섦은 푼크툼의 환유적 속성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프로이트의 설명에 따르면 익숙한 대상에서 느껴지는 낯섦은 무의식적 차원에서 억압되어 있던 기억이나 정신적 충격을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게 만든다. 두려운 낯섦이 가지는 이러한 추동의 능력은 시각이 푼크툼의 환유적 속성을 유발하는 것과 유사한 형태를 가진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의 주검 옆에서 밤을 지새우다 한 줄기의 바람 때문에 시체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는 두려운 낯섦을 느낀다. 이는 어쩌면 어머니를 여읜 롤랑 바르트가 어머니의 온실 사진을 보고 느낀 푼크툼과 동일한(어느 정도 유사한) 감성적 지각일지도 모른다.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 또한 바르트 이전에 있었던 감성적 지각에 대한 논의 중 하나이다. 벤야민은 사진과 영화와 같은 매체의 등장으로 인한 예술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사유했다. 그는 당시의 예술이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서 운명의 시간을 맞이하였다고 말하며 예술과 기술의 만남을 새로운 형태의 동거로 보았다. 새로운 매체 기술의 등장이 새로운 예술 형식을 만들고 그에 따라 예술을 수용하는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난다고 본 것이다. 기술복제시대 예술의 변화를 포착한 벤야민은 이른바‘아우라의 몰락’을 통해 감성적 지각의 새로운 흐름을 설명하고자 했다.
‘신비스러운 분위기’라는 사전적 정의를 가지는 아우라는 본래 종교적인 의미에서 사용되었다. 벤야민은 이러한 아우라를 종교의 영역이 아닌 예술의 영역으로 들여왔다. 아우라를 일종의 감성적 지각으로 규명한 것이다. 그는 예술에서 느껴지는 아우라의 근원을 원본성과 진품성에서 찾았다. 사람들이 굳이 루브르 박물관까지 가서 모나리자 실물회화를 보고 작품이 자신을 압도하는 경험을 하는 이유도 바로 아우라에 있다. 진품은 복수로 존재하지 않는 일회적 존재라는 점에서 대체할 수 없는 아우라를 가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진품의 아우라를 가진 전통회화 작품들은 경배 가치를 지녔다. 또 이런 작품들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개된 장소에 전시되기보다 교양과 권위를 가진 특권층만이 접근할 수 있는 곳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은 물질의 복제를 가능하게 만들었고 이에 따라 이미지가 지녔던 진품성은 해체되었다. 필름 사진과 같은 복제 예술의 등장은 경배 가치를 지닌 이미지를 세속화시켰고 벤야민은 여기에서 아우라의 몰락을 보았다. 더 이상 원본성과 진품성을 담지할 수 없게 된 이미지는 경배 가치 대신 전시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아우라는 예술의 영역에서 완전히 설 자리를 잃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감성학 안에서 펼쳐진 논의에 따르면 기술복제의 시대를 거쳐 원본성과 진품성에서 기인한 아우라는 몰락했을지라도 ‘거리감에서 오는 아우라’는 여전히 예술 안에서 살아남았다. 이는 특권층만이 접근할 수 있는 형태의 아우라가 아니라는 점에서 유의미한 가치를 지닌다. 이미지의 진품성과 원본성은 예술작품을 수용할 때 가까이할 수 없는 거리감을 형성한다. 이는 물리적인 거리감인 동시에 정신적인 거리감을 의미한다. 거리감으로서의 아우라는 본래 경배 가치를 지녔던 이미지가 세속화되면서 전시 가치만을 갖게 될 때에도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러한 거리감은 원격현존이 주요 존재 방식으로 떠오른 기술복제의 시대의 매체적 상황에서도 아우라의 또 다른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감상자는 이미지가‘가까이 있더라도 결국은 먼 곳의 일회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느낌으로써 아우라라는 감성적 지각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는 기술의 발전과 시대의 변혁에도 푼크툼과 같은 감성적 지각이 이미지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앞서 살펴본 감성적 지각들을 통해 푼크툼의 계보가 지성사의 흐름에 따라 바르트가 푼크툼을 이야기하기 이전에도 이어져 내려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각각의 감성적 지각은 이미지나 대상이 가지고 있는 특징임과 동시에 그 특징 때문에 촉발되는 감성적 지각의 행위이기도 하다. 이들이 모두 개인의 주관성과 감정을 중심으로 하는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이 감성적 지각들을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각각의 감성적 지각들은 매우 유사한 속성을 공유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 감성적 지각들이 가지는 가족 유사성을 확인한 앞선 작업은 앞으로의 푼크툼의 계보를 예측하는 데 필수적인 기반 작업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아날로그 시대를 넘어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고 메타버스의 시대를 목전에 두고 있는 현시점에서 푼크툼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전통회화는 원본성과 진품성을 가졌다. 하지만 기술복제시대에 등장한 필름 사진은 이러한 원본성과 진품성을 가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진품성을 근원으로 하는 아우라는 몰락하였다. 하지만 거리감에서 오는 아우라는 몰락을 면하였다. 사진이 과거에 존재했음, 즉 현존의 증명서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우연적 사건을 포착하고 그것이 거기에 존재했음을 지시하는 사진의 특성 덕분에 감상자는 이미지가‘가까이 있더라도 결국은 먼 곳의 일회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느낌으로써 거리감에서 오는 아우라를 지각하였다.
그리고 바르트는 이러한 필름 사진에서 푼크툼을 이야기하였다. 이미지 안의 무언가가 문화적 맥락과 교양적 배경, 그리고 의도와는 별개로 우연히 거기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감상자를 급습하는 상징이자 기호가 되어 주체할 수 없는 감정과 연상을 불러일으킨다. 바르트가 제시한 이러한 푼크툼은 사진의 우연성과 증명성에 기인한다. 그러나 디지털의 시대가 되면서 사진은 현존의 증명서로서의 자격을 잃었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완벽한 복제를 가능하게 했을 뿐만 디지털 만년필을 통한 이미지의 변형을 매우 자유롭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진가들은 포토샵을 통해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과 다른 이미지를 합성하여 현존하지 않았던 것을 현존했던 것처럼 보이게 만들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아예 현실을 담보하지 않는 전적으로 가상의 형태의 이미지를 창작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사진의 증명성에 기인한 푼크툼은 디지털 사진에서 느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미지가 현존을 증명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이미지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감성적 지각이 전부 다 사라지지는 않는다. 철저히 창작자의 의도에 의해 창작된 가상의 이미지라고 할지라도 이미지의 모든 부분이 코드화되어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즉 가상이더라도 이미지를 구성하는 특정 부분이나 요소는 우연적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이미지가 어떠한 사실과도 무관한, 사실에 대한 어떠한 지시 관계도 없는 시뮬라크르가 되어도 티끌만 한 우연적 요소가 감상자를 찌른다면 감상자는 푼크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미메시스보다 시뮬라시옹이 더욱 각광받는 시대가 되면서 창작자는 콘셉트를 제공하는 이른바 ‘메타 작가’가 되었고 감상자는 일방향적인 수용을 넘어서 자신의 주관적인 감상으로 이미지를 완성하는 ‘인터 액터’가 되었다. 어쩌면 참여와 소통을 요구하는 디지털 환경이 오히려 감상자가 푼크툼을 느끼기에 더 자유로운 여건이라고 볼 수도 있다.
또한 푼크툼에서 뻗어 나온 새로운 감성적 지각도 메타버스 시대의 예술에서 나타나고 있다. 디지털 영상 시대의 새로운 예술은 감상자로 하여금 이미지 공간 안으로 들어오기를 요구한다. 이미지 밖에서 또는 이미지 앞에서 단순히 이미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내부에서 주관적인 체험을 이어가길 바란다는 것이다. 디지털 이미지에서 느낄 수 있는 이 ‘몰입감’은 사진 이미지가 가지고 있던 전시 가치를 부정하고 새로운 ‘몰입의 가치’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푼크툼과는 거리가 있지만, 실재를 대체하는 가상의 현존을 몸소 체험하게 만들고 푼크툼이 주었던 일종의 주관적인 경험을 극대화한다는 점에서 연관성을 지닌다.
더불어 이미지의 원본성을 부활시키려는 움직임도 있다. 대체불가토큰, NFT는 Non-Fungible Token의 약자로 단 한 장만 발행되는 가상화폐에 아트를 접목해 이미지의 원본성을 회복시키려는 시도이다. 디지털 이미지 자체는 복제가 가능하기 때문에 전통회화의 방식처럼 원본성과 진품성을 감각하는 것은 어렵지만 NFT 아트 구매를 통해 이미지의 원본성을 증명받을 수 있고 소유권을 인정받는다는 점에서 가상세계에서 이미지의 경배 가치를 부활시키려는 유의미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