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그러게 말이다. 난 누구지? 아니 애초에 “나”라는건 뭘까? 데카르트의 말 처럼 생각하는 존재인가? “나는 누구인가?”하고 지금 질문을 던지고 있는 존재 말이다. 뭐 맞는 말인데 속이 시원하지 않다. 그건 너무 원론적인 얘기니까. 이건 마치, “오늘 점심 뭐 먹지?” 하고 물었더니 “음식” 이라고 답하는 것 같다. 그래… 음식 먹겠지… 근데 내가 물어본게 그게 아니잖아?
한 때 “온전한 나”를 찾는 것에 혈안이 된 적이 있다. 그리고 “온전한 나”로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주변의 각종 소음에 둘러 쌓여 있고, 또 그 소음에 너무나도 민감하다. 주변 사람들의 오지랖은 차치하고서도, 인스타그램 보면서 쟤는 뭐 했고, 얘는 뭐 했고, 뭔가 나는 뒤쳐진거 같은 느낌이 들고… 그런 식의 클리셰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주변 소음을 차단하고 내가 진실로 누구인지에 대해 탐구 해야 한다는 생각과, 그것을 찾은 후에는 온전하게 나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근데 말이다. 애초에 “온전한 나”는 당최 무엇인가? 주변의 영향을 받지 않은 나? 근데 그런게 있나? 나는 지금껏 살면서 내가 선택하지 않은 나의 가정환경과 지리적 배경, 뺑뺑이로 들어간 초등학교, 중학교 교육의 영향을 운명적으로 이미 쥰내게 받았단 말이다. 그걸 제외하고서도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외부적 영향, 바로 유전자가 있지 않은가? 정말로 그것 모두를 벗어난 “온전한 나”라는게 있단 말인가?
혹자는 말할 것이다. “그 모두를 벗어나라는게 아니라네. 자네를 이루는 그 모든 외부적 영향을 인정하는 것이 온전한 나로 살기 위한 첫번째 단계라네, 혁재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반문하고 싶다. “아니 그러면, 내가 보고 자극 받는 저 인스타그램 피드들도 앞으로의 나를 만들어 갈 외부적 영향인 것 아니오? 그 말은 그럼 과거에 영향 받은 것 까지만 인정하고, 미래에 받을 영향은 거부하는 것이 온전히 나로 사는 것이란 말이오, 센세? 그건 뭐랄까… 너무 과거지향적인 것이 아니오?” 그러면 센세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예끼 이놈! 어디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따박따박 말대꾸를 해! 그거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야!”
- 아, 존경하는 센세,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요? “온전한 나”라는게 존재한다고 칩시다. 근데 “온전한 나”가 있다고 해서 “온전한 나”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 그것이 자네에게 가장 알맞고 편한 일이니까. 그러니까 학교에서도 인적성 검사를 하는 것이 아니냐? 적성에 맞는 일을 해야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하고 돈도 많이 벌고…
- 아, 그 말씀은 사람은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한다, 이것입니까?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면서 안분지족 하며 사는 것이 옳은 삶입니까?
- 아니, 그게 꼭 그렇다기 보다는, 스읍… 하…
- 분명 센세가 말씀하셨습니다. 적성에 맞는 일을 해야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하다고. 애당초 우리가 편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선 온갖 역경과 불편함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건 수많은 존경받는 인물들의 실제 사례로서 증명됩니다. 아니, 그보다 센세는 제가 방금 물었던, “온전한 나”가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분명히 답을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그게 뭡니까? “온전한 나”가 분명하지 않은 채로, 도대체 어떻게 “온전한 나”로 산단 말입니까?
- 자네는 싸가지가 너무 없어. “온전한 나”는 자네의 취향, 성격, 재능, 환경 등을 포괄해서 말하는 것이라는건 이미 자네를 제외한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네.
- 그렇게 정의 내린다고 칩시다. 이를테면 저는 짬뽕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저께 저녁에도 짬뽕을 먹었고, 어제 점심에도 짬뽕을 먹었습니다. 근데 어제 저녁에는 한 친구랑 중국집을 갔는데 그 친구가 짜장면을 먹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나니 저도 갑자기 짜장면이 먹고 싶어졌습니다. 게다가 이미 두 끼 연속 짬뽕을 먹었으니 또 짬뽕을 먹자니 뭔가 질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짜장면을 시키려고 하니, 이건 뭔가 “온전한 나”가 아닌 것 같더군요. 아니 글쎄, 그래서 짜장면이 먹고 싶은데도 불구하고 짬뽕을 시켰지 뭡니까? 하하하! 이처럼 우리는 수많은 상태 변화에 직면합니다. 자 이럴때, 짜장면을 먹고 싶어하는게 온전한 나입니까? 짬뽕을 좋아하는게 온전한 나입니까?
- 지금 짬뽕이 중요하고, 짜장면이 중요한가? 자네가 짬뽕을 좋아하는 인간이라고 해도 지금 짜장면이 먹고 싶다면 굳이 스스로를 속일 필요는 없네.
- 이것 보시지요! 센세의 방금 말처럼, 도대체 제 성격이 어떻고 취향이 어떤지가 제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와 무슨 관련이 있단 말입니까? “어떤 방식으로 행동을 해야 한다”는 말그대로 윤리적 당위란 말입니다! 제가 오늘 한 줄이라도 더 공부하고, 한시간이라도 더 작업해야 한다는 것은 제가 어떤 사람이라는 사실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이든간에 도대체 그게 뭐 어쨌단 말입니까? 제가 성격이 고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오늘 센세를 패도 된다 이겁니까? 하지만 저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성질이 고약하기도 하고, 지금 제 눈 앞에서 센세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기도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저는 깜빵에 가게 될 것이니 말입니다. 인간의 행동이란 이렇게 작용합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는 제가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와는 하등 관련이 없단 말입니다. 내가 누구인지와는 관련 없이 오로지 윤리적, 당위적으로 옳은 행동을 하고, 옳은 삶을 사는 것만이 숭고한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삶이, 솔직히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온전한 나’는 바로 이것이다!”하고 스스로를 정의 내리고, 각종 변화를 부정하면서, 그 정체성을 유지 하기 위해서 연기하는 삶보다 자유로운 삶 아니겠습니까?
순간 나는 좆됐음을 깨달았다. 나의 작렬하는 침세례를 그대로 맞으며 일장연설을 듣고 있던 센세는 눈 앞에서 사라지고, 어느 순간 저 멀리서 야구 빠따를 들고 성큼성큼 걸어오는 것이었다. 지금 글을 쓸 상황이 아닌 것 같으니 대충 해결하고 다시 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