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1시.
수술실 앞 이동용 침대에 누운 나에게 그 교수님은 말했다.
‘환자분은 혈종이 신경다발을 다 덮어서 마비가 왔네요, 지금부터 제거 수술을 할 겁니다. 혹시 수술 전에 궁금한 게 있나요?’
‘제가… 다시 걸을 수 있을까요?’
교수님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럴 거예요, 꼭 걷게 되실 겁니다.’
눈물이 흘렀다.
고통은 참을 수 있다. 다시 걸을 수만 있다면…
확신에 찬 교수님의 말씀이 너무나도 큰 힘이 되었다.
또다시 마취.
주사를 맞고 호흡기를 물었다.
지금까지의 수술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수술이라 머릿속이 복잡해서 마취가 잘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데, 내 걱정과는 아랑곳없이 순간적으로 의식이 흐려졌다.
눈을 뜨니 병실이었다.
통증이 거의 사라졌다!
신경 이상의 고통으로 신음해 온 나는, 고통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했다. 신경 이상의 고통은 상상 이상으로 극심한 통증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상감각 (하체가 물침대 위에 있는 듯한 감각)이 있었고 다리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회복은 더뎠다.
마비의 정도, 마비된 시간 등 과학적으로 규명하기 어려운 여러 변수로 인해, 그 누구도 언제쯤 내가 걸을 수 있을지를 명확히 말해 줄 수 없었다.
수술 후 첫 1주일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허리를 수술하였기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아프고 겁이 났다.
밥을 먹을 때도, 침대를 15도 정도만 올리고 아버지가 먹여 주시는 밥을 받아먹었다.
황반변성으로 눈이 나쁘신 아버지는 가끔 내 입이 아닌 볼에 숟가락을 밀어 넣으려 하셨고, 나는 그게 또 마음이 아파져서 울었다.
황반변성
황반변성은 난치병, 아니 불치병이다. 한국인의 실명 원인 1위이며, 발병 시 질환을 최대한 지연시키는 것 밖에는 해결책이 없는 상황이다.
특히, 중심 시력 (초점 부위)을 잃기 때문에 운전이나 일상생활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출처 : 아산병원 홈 페이지 출처 : 삼성병원 홈 페이지
우는 나에게 아버지는 호통을 치셨다.
‘한 집의 가장이 계속 울고만 있으면 어쩌자는 거냐? 그만 울고 살 생각을 해야지!’
나는 울음을 삼키며,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 밥도 억지로 삼켰다. 아버지는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나를 정성껏 간호해 주셨다.
이렇게 아버지와의 1주일이 지났다.
슬슬 아버지의 건강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여든이 넘으신 아버지. 또 눈이 나빠서 작은 글자나 물체를 잘 못 보시는 아버지.
이렇게 병원에서 계속 숙식을 하시다가는 아버지도 쓰러지실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간호간병 통합 서비스라는 것이 있다고 알려왔다.
‘간호간병 통합 서비스라는 게 있는데, 엄청 저렴하대. 아버님 건강이 걱정되니 아버님은 집에 가시게 하고, 그걸 신청해 봐요’
간호간병 통합 서비스
국립 중앙의료원 설명은 다음과 같다.
'보호자나 간병인이 상주하지 않고 간호사와 간호조무사가 24시간 전문 간호(간병)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환자의 간병비 부담을 줄이고 질 높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서비스입니다.'
출처 : 국립중앙의료원 홈페이지 쉽게 말하면 간병인 대신 간호조무사가 상주하는 것인데, 장점은 저렴한 가격이고, 단점은 1:1 케어가 아니기 때문에 중환자나 거동이 매우 불편한 환자에게는 적용이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 몰래 신청했고, 이틀 뒤 자리가 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간호간병 통합 서비스 병동은 일반 병동과는 구분이 되어 있어서, 병실을 옮겨야 했다.
내가 간호간병 서비스를 신청한 사실을 아시고, 아버지는 엄청나게 화를 내셨다.
‘내가 아들 옆에 있어야지, 무슨 소리냐?’
‘난 건강해. 걱정하지 말아. 난 안 간다. 아니 못 간다.’
설득이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의료인인 사촌처남을 통해 아버지를 설득했다.
아버지는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집으로 가셨고, 나는 병동을 옮겼다.
간호간병 전용 병동의 생활은 더 지루했다.
간신히 휠체어를 탈 수 있게 되었지만, 혼자서는 타고 내리지도 못하는 데다가, 아무 데도 갈 수 없었고, 아버지가 안 계시니 인터넷만이 나의 친구가 되었다.
여러 가지로 힘든 업무로 바쁜 간호조무사 분들이 나를 데리고 산책을 시켜줄 수는 없는 일이니…
밥을 먹고 누워서 자고, 주사 맞고 또 누워서 자고, X ray 찍고 또 누워서 자고. 자고 일어나서 또 밥을 먹고….
지루한 일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지루한 일상에 더럽지만 중요한 문제가 생겼다.
바로 대변이다.
소변줄을 끼고 있어 소변은 문제가 없었는데, 대변이 문제였다.
사실 밤이나 낮이나 화장실을 안 가니 편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휠체어 타고 가야 하고, 타고 내릴 때도 도움을 받아야 하니, 소변줄을 끼고 누워 있는 게 속 편했다.
하지만 대변은 소변과는 다르게, 나오는 절차와 처리가 매우 까다로운 것이다.
척추 전문 병원에서 수술한 후부터 대변을 한 번도 보지 못하였으니, 벌써 2주나 숙변이 쌓였고, 장폐색 등 다른 문제가 발생할 우려도 있었다.
미동도 없는 나의 장에 대해 내과 의사는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였고,
결국, 나는 관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