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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자 Apr 25. 2022

우리가 물이 되어 / 푸른 곰팡이 / 의자 詩

강은교 / 이문재 / 이정록  (210425 작년 오늘)




분분히 날리던 꽃잎들 사이로

새로운 꽃들이 

피어났다.

오늘 본 뒷산은 연두색으로 넘실댔고

그 사이에 아카시아가

하양 눈처럼

꽃을 피워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바람에 짙은 저의 체취를 

내게도 뽐내는 아카시아.

지난날

책 속에 마른 꽃 되어

비밀처럼 숨겨뒀던

그리움을 소환시키는 너.


해가 길어지면서

어둠은 더디 오고

회색빛 그 어디쯤의 이 공간은

마음보다 먼저 적막을 

발끝에 매단다.




작년 낙동강 어디쯤




우리가 물이 되어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의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강은교


아픔이 불처럼 타는 곳에서

물을 만나 

뜨거운 심장 식힐 수 있다면.

너와 내가 물길만큼

넓고 깊은 거리의 물이라면

흔들리는 가슴 부여잡고

열심히 너를 향해 흘러야지.

그리하여

비로소 하나 되는

따뜻한 포옹.





푸른 곰팡이
           - 산책시 1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 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이문재



예전만큼 흔하게 볼 수 없는  

빨간 우체통.

막연하게 우연히라도 만나면

잠시 멈춤으로

하늘 한번 보고.


사랑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를 

우체통과 손끝 스치며

안으로 안으로

떨어뜨리던 그 설렘들을

토해낸다.


아득한 그날들은

흑백사진으로 남고

어색한 몸짓으로 날리는

인사.





작년 가을 어느 날





의자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 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뙤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이정록




엄마는 잔소리꾼이셨다.

늘 삐딱선을 타던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당신의 말들을

잔소리로 치부해버렸었다.


지금은

깊이 팬 주름 고랑마다 심었던

사랑을 주셨다는 것을 안다.

언제나 그렇다.

한발 늦음. 

그 한 발이 늘 나의 마음속에 

사무치는 아픔의

한 발이 되어버렸다.

어른 말 그른 거 하나 없다. 

불변의 진리.



나는 누군가에게 의자인 적이 있을까.

나에게 의자였고, 의자인 사람들이

습기 찬 유리창에서

하나씩 그려진다.

지나가다 힘들면

잠시라도 자리 내어줄 수 있는 

의자 같은 사람.

그런 사람

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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