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오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터벅터벅 주전자를 들고 길을 걷습니다. 아득히 먼 길 같기도 하고 아주 가까운 길 같기도 합니다. 어둠이 서서히 길모퉁이를 돌쯤이었습니다.
아이의 집은 동네의 제법 높은 곳에 있습니다. 부산으로 이사를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어요. 아이에게 는 매일이 새롭고 신기한 것 투성이라 신나고 신나는 날들이었습니다.
엄마가 심부름을 보내서 아이는 호기롭게 길을 나선 중입니다. 돌아오는 길은, 까맸습니다. 어둠이란 녀석이 자꾸만 뒤통수를 간질이며 서성대는 것만 같아서 머리는 가렵고 걸음은 빨라졌습니다.
주전자에 담긴 하얀 막걸리는 자리가 비좁았는지 울컥울컥 자꾸 길 위에다 자신을 토해냅니다. 주전자가 무거워 아이는 툴툴대며 걷습니다.
머리를 깔짝대는 것이 바람인지 냄새인지 어둠인지, 아이는 남은 한 손으로 자꾸만 슥슥 머리를 매만지며 뒤를 돌아봅니다. 몇 번이나 돌아봅니다. 분명 아이를 툭툭 건드리는 무언가가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 몰라 갑자기 두려움이 왈칵 밀려왔습니다.
작심하고, 한 번은 홱 고개를 돌려 매섭게 눈을 치켜뜨고 뒤를 노려봤습니다. 내가 이길 테다 하면서요. 하지만 있는 것은 어둑어둑한 어둠뿐.
아이는 '휴우' 가파른 숨을 내쉬며 잠시 멈추어 섭니다. 그러고는 검은 저너머를 향해 눈을 들어 바라봅니다.
순간.
아이는 형언할 수 없는 빛들에 깜짝 놀라고 맙니다.
'와 저기는 어덴데 빛이 저래 많노. 저 불빛들은 다 집인긴가. 어디서 빛나는 기고? 별보다 더 반짝반짝 대네. 근데 와 저래 멀리서만 밝노. 내 주위는 어둡기만 한데. 내 옆에 와서 환하게 길 좀 비차주지. 무섭지 않구로.'
마음이 쿨적쿨적, 꼬물꼬물 댔습니다.
무엇엔가 홀린 듯 아이는 오래 그곳을 바라보고 서있습니다. 한참을 바라보노라니 마음에서 스멀스멀 야릇한 기분이 생겨납니다. 딱히 뭔지도 모를 감정 한 움큼이 가슴에서 자라났습니다. 아이는 이상하게 울고 싶어 졌습니다. 코끝에 달랑대는 시큰함은 아마도 그리움이라는 이름이었을 겁니다.
내 것이기도 했지만 내 것이 아닌 것들은 저 불빛들처럼 아른아른 멀리에도 있나 보다. 그곳과 그 동무들과 두고 온 그것들은.
찰랑찰랑 물이 눈 속으로 차오릅니다.
내 것이었던 것들. 아니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슴한 불빛들 위로 하나씩 하나씩 삐죽 대는 슬픔들이 덧칠을 합니다.
아이는 빨개진 눈을 쓱 문지르고는 집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주전자는 멀미를 하는지 아직도 꾸역꾸역 속엣 것들을 뱉어내고, 아이의 꿀적한 마음도 푸쉭푸쉭 빠져나갑니다.
이윽고 집 문을 여니 엄마가 엄마냄새를 달고 휘뚜루마뚜루 뛰어나옵니다. 웃으면서 아이의 엉덩이를 톡톡 토닥여줍니다.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씩씩하게 손을 내밀어 주전자를 엄마에게 건넵니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이며 웃습니다.
엄마도 아이도 함박미소가 입가에 걸립니다.
부산을 부산으로 기억하게 된 첫 기억입니다. 아주 어릴 때라 부산인지도 몰랐던 그때.
그날의 불빛들이 왜 지금까지 선명하게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있는지는 저도 그 까닭을 알지 못합니다. 그날의 그 풍경을 보면서 느꼈던 기분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이제와 그날은 그날의 불빛만큼이나 그립고 따뜻한 뭉뚱그려진 조각의 하나일 뿐.